조선을 대신해 청나라가 협상, 영국 물러갔지만 청의 내정간섭 불러오며 거문도로세계 성공회의 중심인 영국 성공회가 최고 직위인 주교직을 여성에게 개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영국 성공회가 세워진 지 480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성공회는 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 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동안 성공회나 가톨릭에서 여성은 주교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1889년 대한성공회가 세워져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성공회가 세워지기 4년 전인 1885년 영국은 무단으로 거문도를 점령해 우리 조선 정부와 백성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29년전 일이다.
조선 남쪽의 작은 섬에 나타난 영국군
1885년의 어느 여름날, 남해의 여수항에서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온 어부들이 자기들이 본 이상한 풍경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네, 삼도 쪽에 가 봤나? 삼도가 이상해졌어.”
“그곳에 서양 군함들이 정박해 있고, 이상한 깃발도 꽂혀 있던데?”
“서양 군인들도 득시글거리고 있더라고.”
“영길리 사람들이 몰려와 자기 나라 깃발을 꽂아둔 거야.”
“영길리? 그건 또 어느 나라야?”
‘삼도’는 옛 사람들이 거문도를 부르던 이름이다. ‘영길리’는 조선 시대에 영국을 부르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데 조선 앞바다에 있는 섬을 왜 영국군이 점령했을까?
조선 남쪽의 작은 섬 이름이 해밀턴?
1885년 4월, 조선의 외교 통상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장관 앞으로 북경 주재 영국 외교관이 문서를 한 통 보냈다. “제가 지금 본국에서 온 외교문서를 받았습니다. 영국이 조선 남쪽에 있는, 영어로 ‘해밀턴’이라고 하는 섬을 얼마 동안 차지하고자 하니 조선 정부에 이 내용을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이 조선 남쪽의 작은 섬을 자기들 마음대로 얼마 동안 차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선 남쪽의 작은 섬을 영국에서는 해밀턴이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영국인이 해밀턴이라고 부른 그 섬이 바로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거문도였다.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1845년 무렵 대한해협을 항해하던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발견하고는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이었던 해밀턴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 항(港)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로부터 40년 뒤인 1885년 3월 1일 영국 동양함대의 군함 세 척이 조선 정부의 정식 허가도 없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것이었다. 이렇게 영국군이 거문도를 강제로 점령한 일을 ‘거문도 사건’이라고 부른다.
영국군이 요새로 삼았던 섬, 거문도
당시 유럽의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경계 문제를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러시아가 군함을 동아시아로 향하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로 집결시키자, 영국은 남쪽의 부동항(不凍港·1년 내내 얼지 않는 항구)을 원하는 러시아 함대가 조선의 동해에 있는 영흥만을 점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1884년에는 러시아가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기도 했다. 어쩌면 영국 정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을지도 모른다.
“러시아 군함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이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 러시아 함대가 남쪽으로 와서 조선의 동해를 점령하려는 건 아닐까요?”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군. 먼저 조선 남해의 해밀턴 항을 점령해 그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게.”
이렇게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영국 국기(國旗)를 게양하고 포대와 병사들이 지낼 병영을 짓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그 뒤 거문도에 머무른 영국군은 처음에는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늘었고, 군함은 5∼6척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거문도에 살던 주민은 영국군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품삯을 받았다고 한다.
약해진 조선의 국력 보여준 사건
조선 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은 영국의 군함을 막을 군사력도, 영국군을 물러나게 할 외교적인 영향력도 없었다. 국가의 힘이 약해서 영국·러시아·미국·청·일본 등 세계 강대국과 주변 나라들의 눈치만 볼 때였다. 조선 정부는 엄세영과 조선의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를 거문도에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그들은 곧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해군 함대 사령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영국은 조선 정부의 항의를 무시하고 거문도에 있는 병사와 군함을 철수시키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무시하고 대신 청나라와 외교적 협상을 벌였다. 결국 청나라 정치가 리홍장이 러시아로부터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한 뒤에야 거문도에서 물러났다.
이때가 1887년 2월 27일이었다. 영국군은 2년 동안 거문도를 마치 자기 영토처럼 여긴 것이다. 이름까지 마음대로 해밀턴 항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영국이 일으킨 사건에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결과적으로 청나라의 조선 내정 간섭이 더욱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거문도는 면적 12㎢이다.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다도해의 최남단 섬이다. 서도·동도·고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도만을 거문도라 부르기도 한다. 옛 이름은 삼도·삼산도·거마도 등이었으나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하여 거문도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미국이 영국 식민지를 벗어난 1776년에서 꼭 100년이 지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미국·영국·이탈리아·독일·러시아 등과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시기 맺어진 조약들은 대부분 불평등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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