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 1894년 7월 25일 이른 아침 풍도(지금의 안산 대부도 부근)앞바다. 평화롭기만 한 아침 바다에 떠있던 중국 함대를 향해 일본군이 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청나라 군사들은 당황했지만,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일본의 공격을 받은 청 함대는 큰 손실을 입은 반면, 청의 공격을 받은 일본 함대는 멀쩡했다. 청군 1000여명은 그 자리에서 바닷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풍도해전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이 바로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청과 1871년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조약을 맺었지만,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었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진 이후에 청은 리훙장이 주도하는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운동을 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개혁 방향은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는 “청은 독일에서 최신식 전함을 사 가는 것이 목표였으며, 일본은 독일의 제도와 시스템을 배워 가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당시 청은 서양 무기만 있으면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신 무기만 있다고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청의 관리들은 자기 주머니를 챙기기에 급급했고, 서태후의 별장인 이화원 건축과 생일 파티 준비에 군사비용을 퍼다 쓰는 형편이었다. 청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일본은 서양식으로 제도까지 개혁한 후 전쟁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淸)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나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인천항으로 군대를 보냈다. 6월에 청의 군대가 도착했는데 생각지도 않던 일본군이 먼저 조선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전에 갑신정변 후 맺은 톈진 조약에서 ‘청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에는 서로 알린다’는 조항을 이유로 내세우며 들어온 것이었다. 두 나라 군대가 들어온 후 동학농민군은 외세를 불러들인 것을 후회하며 전주성에서 정부군과 협의하고 고향 땅으로 돌아갔다.
동학농민군 문제는 사실상 해결된 셈이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청·일 두 나라 군대에 돌아가라고 요청했지만, 어쩐 일인지 청나라 군대도 일본 군대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조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기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일본이었다. 군사를 동원해 경복궁과 4대문을 점령하고 조선에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일본은 풍도 앞바다에서 청을 공격해 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청(淸)은 성환 전투와 평양 전투 등에서 이어진 싸움에서도 크게 패했다. 청나라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주력 함대의 대표적인 배는 1894년 황해 해전에서 일본군에 침몰 당했다. 일본의 기세가 점점 커졌고, 중국은 본토까지 침략당할 위기에 놓이자 결국 패배를 인정했던 것이다.
1895년 4월 17일, 일본의 시모노세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요릿집에서 청의 리훙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마주 앉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청은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그리고 청의 국가 예산의 2배가 넘는 큰돈을 배상금으로 일본에 지불했다. 일본은 이 돈으로 철을 만들고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세워 산업혁명에 더욱 속도를 붙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랴오둥 반도, 타이완, 펑후 섬 등도 일본이 차지하게 됐다.
그즈음 일본은 은근슬쩍 센카쿠 열도를 일본의 영토로 삼았다. 랴오둥 반도는 러시아의 간섭 때문에 중국에 되돌려주기는 했지만, 청일전쟁 이후 아시아의 주도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 데 발판이 되었다. 반면 조선은 청과 일본 사이에서 하소연할 곳도 없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았고, 갑신정변, 갑오경장마저 실패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조선일보 이한수 문화부 차장이 한국. 중국. 일본의 청일전쟁 현장을 취재한 기사를 보면 “지금 일본은 과거를 영광스럽게 회고하고 있다. ‘1882년 군함 정비 계획안에 따라 2400만 엔을 들여 8년에 걸쳐 군함 32척 건조 계획을 세웠다’ ‘히로시마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메이지 천황이 1894년 9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27일까지 머물렀다’. 관련 전시관과 기념물의 안내 글은 조용히 사실을 적었다.
사세보 해상자위대 사료관에는 1945년 8월까지 침몰한 일본 함정 수를 도표로 정리했다. 태평양전쟁 중 항공모함 25척, 구축함 253척, 잠수함 170척, 순양함 42척 등 모두 502척이 침몰했다는 내용이다. 이미 70년 전에 이 같은 대규모 함대가 있었다. 침략 전쟁을 일으켜 다른 나라 국민뿐 아니라 일본 국민도 다수 희생됐다는 반성과 참회는 단 한 구절도 없었다.
중국은 굴욕의 역사를 깊이 새기고 있었다. 청일전쟁 때 북양함대 사령부가 있던 산둥성 웨이하이의 류궁다오(劉公島)에 세운 갑오전쟁박물관은 치욕스러운 역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청은 류궁다오 함락으로 굴욕적인 패배를 맞았다, 제독 딩루창(丁汝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거액의 배상금을 내고 대만 등 영토를 빼앗겼다, 일본군의 뤼순 점령 때 중국 민간인 2만여 명이 학살됐다는 내용이다.
전시관 출구에는 “갑오전쟁에서 패전한 굴욕적 역사는 ‘낙후하면 곧 당하게 된다’는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해상 강철 장성(長城)을 구축함으로써 역사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다짐을 적었다.
한국의 현장엔 아무것도 없었다. 전문가의 안내가 없으면 어디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일본군은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포로로 잡았다. 청과 일본은 7월 29일 성환 전투를 시작으로 조선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에서 동학농민군 3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하지만 경복궁에도, 성환에도, 학살 현장에도 이를 기록한 곳은 없었다.“
치욕의 현장을 지우는 것이 상처를 이기는 방법이라고 여긴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역사를 정직하게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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