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18 11:10
창립 60년주년 맞는 한진해운...20일 행사가져
한진해운이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는다.
현재 한국 해운업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시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한진해운의 역사는 그것이 곧 한국 해운의 역사를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진해운의 뿌리인 대한해운공사가 1949년 설립되고 1950년 1월 업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진해운은 오는 20일 창립 60주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한진해운 낳은 대한해운공사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12월23일 첫 국책회사로 출범한 대한해운공사가 바로 한진해운의 모태다.
광복 직후 우리나라 해운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외항선은 일제하에서 조선우선(朝鮮郵船)이 운항하던 부산호 1척이 고작이었다.
새로 수립된 정부는 국가재건과 무역 자립을 위해 해운육성이 최우선 과제라고 보고 당시 교통부가 운영하던 연안운영 선박(부영선박)과 일제 잔재인 조선우선을 합쳐 반관반민의 특별회사를 만들었다.
대한해운공사는 1950년 1월1일 사선 5척과 정부 대여선 20척 등 총 25척으로 세계무대를 향한 우리 해운의 본격적인 출항을 시작했다.
공사는 창립 초기 최대 과제를 선대 확충에 두고, 미군이 사용하던 선박을 확보하는 한편 일본에서 회수하지 못한 선박을 반환받는 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같은 해 2월 한일항로를 개설하는 등 원양 항로를 점진적으로 개척하며 외항 화물 수송을 외국 선박에 의지하는 데 따른 국가 경제 부담을 줄여나갔다.
출범 후 6개월 만에 발생한 한국전쟁에서 대한해운공사는 전시 비상 운송에 참여했고, 전쟁 중이던 1951년 대일항로를 정기화하고 1955년 9월에는 홍콩 정기항로를 개설하는 등 국제 외항선사로 발돋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60년대 들어 '우리 화물은 우리 선박으로 수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정기항로를 확장, 한국~일본~미국 서안(西岸)을 운항하는 태평양 정기항로를 개설(1962년)했다.
이어 '세종호'를 필두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뉴욕 정기항로(1967년)를 텄고, 1971년에는 뉴욕항로와 미 서안 항로를 이원화하면서 북미 동서 2개의 항로에서 총 9척을 운항하는 정기선사로 발돋움했다.
◇대한해운공사와 한진해운의 만남 = 1960년대 지속적인 흑자를 보던 대한해운공사는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출범 18년 만인 1968년 11월 완전 민영기업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1970년대 초 철강 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이 되고, 포항종합제철이 가동되면서 철강 원료 전용선 사업에 첫발을 내디디며 장기안정 운송체제를 구축하고, 정기항로의 컨테이너화를 추진했다.
1978년 개장한 부산항 컨테이너 부두에 12월 대한해운공사의 컨테이너선인 `코리아 코맨더호'가 처녀 입항하는 것으로 최초의 부산 직항 미주 컨테이너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러나 1978년 불어닥친 제2차 석유파동으로 대주주가 변경되면서 1980년 2월 대한선주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고 영업조직과 운송기반을 확대했다.
그 결과 1978년 말에는 11척 33만DWT(재화중량톤수), 1983년에는 20척 111만DWT로 선박보유량이 증가했고, 운임 수입도 1억 달러에서 3억 달러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세계 해운은 1981년부터 불황에 휩싸이며 1983년 중반에는 세계적 대형 선사들이 도산하는 등 적자 운항시대가 계속됐다.
국내 해운업계도 115개 사에서 20개 그룹 선사로 재편됐다.
대한선주도 선주상선을 합병했으나 결국 정부와 금융단이 추진한 `대한선주 경영정상화를 위한 대책'에 따라 1987년 한진그룹 산하에 들어가게 됐다.
대한선주는 대한상선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꾼 뒤 1988년 12월에는 한진그룹이 갖고 있던 `한진해운'(HJCL)과 합병하며 한국 최대 선사는 물론, 세계적 해운 기업의 면모를 갖추고 `한진해운(HJS)'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한진그룹의 기존 한진해운(HJCL)은 조중훈 회장의 의지로 1977년 컨테이너 전용선사를 표방하며 설립됐다.
이로써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컨테이너 운송 시대가 열렸다.
◇세계 10대 선사로 발돋움 = 국내 최대 해운선사로 발돋움한 한진해운(HJS)은 글로벌 선사로 도약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86년에는 한진 `뉴욕호'를 시작으로 1991년까지 연차적으로 컨테이너선 2천70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급 18척을 도입했고, 국적선사로서는 처음으로 4천TEU급 컨테이너선을 발주하며 선대의 대형화를 선도했다.
1991년에는 2천700TEU급 신형 고속선을 주력 선대로 아시아~구주 항로와 아시아~북미 항로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운송 실적과 매출액에서 급신장을 기록했다.
이와 함께 신조선 6척을 투입해 전용선 서비스를 확대하는 등 벌크 운송 서비스를 대폭 개선해 1991년에는 매출 10억 달러와 흑자경영 체제를 이루며 세계 10대 해운선사의 위상을 확보했다.
글로벌 경영체제를 구축하며 1995년 중국~유럽 직항로와 1996년 중국~미국 직항로를 개설하는가 하면 서비스 지역을 태평양과 대서양, 지중해, 인도양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간 고도의 성장을 실현했다.
외환위기에 이어 1999년부터 해운 시장이 회복세를 보이자, 해외에 이어 국내에도 부산과 광양에 전용 터미널을 개장했고 세계 3대 컨테이너 항만의 하나인 대만의 가오슝과 미국 오클랜드에도 전용 터미널을 확보했다.
9.11테러 이후 침체한 세계 해운 시황이 2003년 호황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같은 해 7월 취임한 고 조수호 회장을 주축으로 전 부문에 걸쳐 혁신이 추진됐다.
2004년에는 사상 최대인 8천198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고, 포브스지(誌)에 의해 세계 400대 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국적선사로는 처음으로 1만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발주(2006년)하기도 했다.
2006년 11월 한진해운을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어 온 조수호 회장의 사망으로, 미망인인 최은영 회장이 2009년 1월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한진해운은 2008년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지난해 힘든 시기를 경험했지만, 지난해 12월부터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세계적 선사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코리아쉬핑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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