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우리 해운이 규모를 갖춘 국제산업으로 성장하여 국가경제에 크게 이바지하는 오늘에 이름과 때를 함께 해온 항만의 파수꾼 도선사들의 활동과 협회 설립 역사를 더듬어 보면 1976년 3월13일을 기해 교통부 해운국으로부터 외청으로 독립하여 국군보안사령관 출신 강창성 초대청장을 맞은 항만청(후에 해운항만청으로 개칭)은 비인가단체라는 이유로 전국 규모의 도선사협회 실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간 부산항과 인천항에만 도선사 조합이 설립, 운영돼 왔고 기타 항만은 구성인원 요건상 조합 설립이 불가한 도선구로 취급되어 온 탓이었다. 인천항 도선구의 배순태 도선사와 부산항 도선구의 전덕준 도선사가 중심이 되어 1974년 1월에 ‘한국도선사협회’의 창립 총회를 열어 초대 회장에 배순태 도선사를 뽑고 협회 설립의 닻을 올렸으나 당시 교통부 해운국의 반대는 항만청으로 개편되고도 끝내 협회 인가를 거부하고 무산시켰다.
그러나 비인가단체라는 불리를 딛고 어떻게 해서든 단일 조직체로서 도선사협회가 설립돼야 한다는 의지가 결실을 맺어 비합리적인 관행을 시정하고 도선사들의 자존과 합리적인 정책을 구현해 나간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정부측 주도로 1977년 8월31일 부산항 최수일 도선사를 발기인 대표로 내세워 인천항 김동균 도선사 등이 모여 창립 발기인단을 구성하여 발기 총회를 개최하게 됐다.
항만별 발기인으로 참여한 도선사는 인천항 도선구를 대표해서 김동균, 정희정, 김수금, 설동수 도선사, 군산항 이긍섭 도선사, 여수항 김기현 도선사, 마산항 정형태 도선사, 부산항 최수일, 김원중 도선사, 울산항 차봉옥, 유래혁 도선사, 포항항 김규용 도선사, 묵호항 도남섭 도선사 등이었다.
‘한국도선사협회 30년사’에 의하면 당시 전국 도선사 40명중 37명이 참가했고 그해 9월1일 서울 그랜드호텔에서 정관을 통과시키고 최수일 도선사를 초대회장으로 뽑아 드디어 도선사들의 숙원사업이던 ‘사단법인 한국도선사협회’를 탄생시켰다.
부회장으로는 윤영원·차봉옥 도선사를, 이사에는 정희정, 김수금, 김원중, 최용도, 이용규 도선사 등 11명을 뽑았고 협회 사무국 초대 책임자로는 이성림 울산지방해운국장 출신을 선임했다. 이 전무는 서예와 동양화에 능하며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으로 매사에 임했다.
사무실로 그림 선물을 들고 찾아와 ’73년에 이미 선주협회로 개가(?)를 해서 조사부장을 거쳐 해무부장으로 당해 업무를 맡고 있던 필자와 첫 만남을 가진 이후 둘의 인연은 어언 40년이 흘렀다.
한편 퇴임 해운항만 관계(官界) 출신 모임 해항회(회장 : 김종태/전 인천항만공사 사장)의 한준규 상근부회장(전 인천지방해양항만청장)에 따르면 이 전무는 아흔에 가깝지만 아직도 건강을 유지하며 활동 중이라 한다. 그윽하게 인자하던 옛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게 회상되어 다가온다.
또 협회는 활동무대를 국제적으로 넓혀갔다. 1963년에 설립된 ‘유럽도선사협회(EMPA)’가 중심이 되어 1971년에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제 1차로 국제도선사협회(Interna tional Maritime Pilots’ Association/IMPA)가 창립 총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하여 2년마다 각국으로 옮겨가며 총회를 개최하고 세계의 도선사들과 만나 국제적인 친목도 다지고 정보교환을 했다.
출범 후 미국의 휴스턴, 영국의 미들즈버러, 일본의 교토, 스페인의 마드리드,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를 거쳐 2008년의 제 19차는 태국의 방콕, 작년 2012년의 제 21차는 영국의 런던에서 개최하여 국제해사기구(IMO)와의 업무유대도 더욱 공고히 다져가고 있으며 대망의 제 23차 총회를 드디어 2016년 우리나라에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글을 쓰면서 놀란 것은 이용자단체에서 도선관련 업무의 실무책임자였던 필자 기억으로 당시 도선사협회가 발족하던 1977년 우리나라의 총 도선사수가 40명에 불과했던 것을 이제사 알게 된 것이고 그리도 희귀한 존재의 대명사격이던 도선사가 현재는 수습 10여명을 포함, 250여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현재 고급 두뇌인력 집단의 대표적 직종으로 일컫는 국회의원 정원 299명에도 못 미칠 정도로 적은 숫자이지만 1995년에 100명을, 2004년에 200명을 훌쩍 넘어섰다는 게 경이롭기만 하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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