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고 말해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말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지만,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길을 걷겠다는 의미로 풀이되기도 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고객에게 택배는 배달된다.” 물류업계에도 본연의 업무를 충실히 달성하기 위해 밤낮을 모르고 뛰어다니는 이들이 있다.
지난달 18일 한국과 러시아의 첫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시각, CJ대한통운 중구 물류센터에 택배기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월드컵이 열려도 물품은 배송돼야 하기 때문이다. 택배기사들은 틈틈이 곁눈질로 월드컵을 시청하며 손발은 분주히 움직였다.
택배기사의 하루는 택배상하차(일명 까대기) 작업과 함께 시작된다. 택배기사는 각자 지정된 위치에 자신의 차량을 주차하고 컨베이어를 통과하는 물품의 주소를 확인한다.
자신이 맡고 있는 지역의 물건을 분류해 차량에 상차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혹 옆 동료가 놓치는 물건은 서로 챙겨준다. 분류작업이 지연되면 배송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11시가 넘어서자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물품들도 차츰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차량은 어느새 배달해야 할 물품으로 꽉 들어찼다. 분류작업을 마친 택배기사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점심식사도 거른 채 곧장 택배배달에 나섰다.
기자와 동행취재를 함께한 조정관씨는 올해로 택배경력 8년차의 베테랑이다. “하루에 평균 200~230개 정도 택배를 배송한다”며 “각 요일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보통 화요일이 많이 바쁘고 월요일은 한가한 편이다. 조금 한가한날은 점심식사를 하지만 택배물량이 많은 날은 점식식사를 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물건을 차량에 상차할 때 배송할 동선을 고려해 차량에 상차해야 한다. 처음에 이 업무를 하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달정도 업무를 해보면 각 지역의 동선이 파악되고 본인에게 편한 루트를 고려해 물건을 적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조정관씨는 대한통운 택배기사로 입사해 경력을 쌓아왔지만, CJ CLS와 CJ대한통운이 합병하면서 기존에 맡았던 지역이 아닌 서울시 중구 신당동 일대를 새롭게 맡게 됐다. 조씨가 신당동 일대를 담당한 지 1년 남짓, 하지만 그는 이 지역 일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다.
“1년쯤 한 지역에서 업무를 하다보면 시기적으로 고객이 주문하는 물품에 대한 패턴이 보여요. 반복해서 물건을 배송하다보면 회사나 가정집에서 주기적으로 주문하는 물건이 분석되기 때문이죠. 요즘은 가정이나 회사에서 생수나 휴지 등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품을 주문하는 사례가 빈번해 노동의 강도가 조금 더 세진측면이 있어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택배기사들 사이에서도 선호하는 지역이 각기 다르다. 주택가로 배송되는 물품과 사무실이 밀집한 지역으로 배송되는 물품의 특성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대다수 택배기사는 사무실이 밀집한 지역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대량의 소화물을 배송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조씨와 본격적으로 배송에 나선 시각은 12시. 마포구 도화동 물류센터에서 배송지역인 중구 신당동까지 이동하는데 20분가량이 소요됐다. 오후 6시부터는 화주사들을 방문해 물건을 ‘픽업’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넉넉치는 않았다. 물건을 픽업한 뒤 센터로 돌아와 하차작업을 하면 보통 밤10시쯤 된다.
기자도 오늘만큼은 ‘기자’의 신분을 벗고 택배기사의 조수를 자처하고 나섰다. 조정관씨도 이에 흔쾌히 응해 이곳저곳 택배배송을 지시했다. 직접 현장에서 고객들과 마주하다보니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엄밀히 따지면 택배기사의 역할은 문전배송이다. 하지만 택배를 배송한 뒤 돌아서자, 물품을 창고까지 집어넣고 가달라고 부탁했다. 부탁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간혹 어떤 이들은 명령조로 택배기사를 잡부 부리듯이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고객은 상의와 하의를 탈의한 채 속옷만 입고 나와 물건을 수령했다. 초면에 다소 민망했지만 고객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 중 가장 씁쓸했던 경우는 물건을 집 앞에 놓고 가라고 하는 이들 이었다. 세상이 흉흉해졌다지만 택배기사를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하며 얼굴조차 보길 꺼려했다. 문제는 이 같은 비율이 조금씩 증가한다는 것이다.
“8년 전 처음 택배업에 발을 담았을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정’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10명중 6명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물건을 집 앞에 두고 가라고 할 정도로 세상이 삭막해졌어요.”
이 같은 배경에는 택배업체간 과당경쟁이 한 몫 했다. 8년 전과 비교해 택배물동량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이에 반해 택배단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각 기업에서 택배단가를 낮춰 경쟁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택배기사의 근무환경은 열악해졌고 이는 곧 고객에 대한 서비스품질 저하로 연결됐다. 수년간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일부 택배기사는 고객과 언쟁을 하는 경우도 빈번히 발생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지속되면서 고객들은 택배기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고객을 대할 때는 되도록 웃는 낯으로 대하려고 노력해요. 그래야 서로 기분 상할 일도 없고, 이 지역을 담당하는 택배기사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기 때문이죠. 수익적인 부분도 일반 직장인들과 비교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밤늦은 시각까지 근무를 하긴 하지만 정직하게 노력해서 정직하게 돈을 벌기 때문에 제가하는 업무에 만족하는 편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컴퓨터와 모바일등을 이용해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주문한다. 물건은 빠르면 당일배송 되고 늦어도 다음날 배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신속하게 물건을 받을 수 있는 배경에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택배기사의 노고가 숨어있다. 물류현장 최전선을 뛰어다니는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다.< 김동민 기자 dmkim@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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