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해운업계에선 티피씨코리아의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폐지가 핫이슈가 됐다.
티피씨코리아는 해운산업이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 매출액 기준으로 따져 국내 선사 순위 10위권에 올랐던 중견 선사라 법정관리 폐지는 더욱 충격이 컸다.
해운업의 불황이 몇 년 째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달 30일 티피씨코리아가 회생절차를 통해 채무를 변제해나갈 능력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티피씨코리아의 법정관리 폐지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해운산업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벌크선 시장의 경우 1000포인트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건화물선운임지수(BDI)에서 알 수 있듯 선사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에 다다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컨’선사 자구노력 ‘통했다’
올해 해운산업은 만성적인 불황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물동량은 상승 폭이 둔화되고 있고, 운임은 예년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선사들은 지난해에 이어 적자 성적표를 받아들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컨테이너선사와 벌크선사 간 시황해석에 온도차가 감지된다.
컨테이너선은 올해 초 선사들의 합종연횡과 선복감축, 감속운항(슬로스티밍) 계선 등의 자구적인 노력에 힘입어 2분기 이후 분기 실적에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비록 1분기에 막대한 규모의 적자를 낸 탓에 연간 실적에선 흑자 전환이 쉽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호의적이다.
원양 컨테이너선사들은 11월부터 유럽항로에서 운임인상(GRI)을 도입했다. 인상 폭은 20피트 컨테이너(TEU)당 500달러 안팎이다.
시장상황을 들여다보면 선사들의 운임회복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달 1000달러대 붕괴가 우려됐던 유럽항로 운임은 11월 이후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전액은 아니더라도 인상분이 시장에 반영된 것이다.
이번 GRI는 한국시장보다 중국과 홍콩시장에서 더 강력하게 추진됐다. 상하이항운거래소가 2일 발표한 상하이발 북유럽행 컨테이너 운임은 TEU당 1491달러를 기록했다. 지난달 15일 1113달러에 비해 350달러 이상 상승했다.
영국 해운조사기관인 드류리쉬핑컨설턴트는 1일 운임지수 발표를 통해 상하이-로테르담간 운임이 40피트 컨테이너(FEU) 기준으로 일주일 전에 비해 788달러 오른 2865달러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TEU 기준으로 1432달러까지 상승한 것이다.
한국 시장에서의 GRI 도입은 중국만큼 성공적이진 못했다. 한국발 유럽항로 운임은 1300달러 수준을 보이고 있다고 선사들은 전했다. 대략 200달러 안팎의 상승효과를 본 셈이다. 다만 유럽항로는 수요 약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향후 전망이 밝지 못한 편이다.
아시아-유럽항로 월간 물동량은 지난해에 견줘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컨테이너트레이드스터티스틱스에 따르면 아시아발 유럽행 컨테이너 물동량은 7월과 8월 두 자릿수로 감소했으며 9월에도 2%의 역신장을 거둔 것으로 집계됐다.
국적선사 한 관계자는 “한국 시장의 수요는 중국에 비해 약세가 심해 이번 GRI도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며 “중국시장의 수요도 지난달 말 살아나는 듯 싶다가 다시 위축되고 있어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선사들이 선복 감축과 계선 등의 방법으로 시장 부양을 꾀할 것이란 점에 미뤄 비관하기엔 이르다. 머스크라인과 CMA CGM, G6, CKYH 등 세계 유수의 선사 그룹들은 이미 유럽항로에서 동절기 운항프로그램 등의 방법으로 선복 감축을 단행했다.
머스크는 특히 올해 유럽항로에서 CMA CGM과 공동운항하던 2개 노선을 철수함으로써 21%의 선복을 감축했다. 경쟁선사인 MSC와 손을 잡은 CMA CGM과 결별수순을 밟는 동시에 선복 축소를 통한 시장 상승효과도 함께 노린 것으로 풀이된다.
북미항로는 올해 들어 강한 수요를 배경으로 턴어라운드에 목말라 있는 선사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특히 미 동안 항로 운임은 성수기를 맞아 9월 한 때 4000달러(FEU 기준)에 육박하기도 하는 등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정기선사들은 3분기에도 2분기에 이어 흑자행진을 이어갔다. 한진해운은 2분기 738억원에서 3분기 970억원으로, 싱가포르 APL은 2분기 700만달러에서 5500만달러로 영업이익 폭을 각각 늘렸다. 중국 차이나쉬핑컨테이너라인(CSCL)은 2분기 9121만달러, 3분기 5980만달러의 영업흑자를 냈다.
근해항로는 동남아항로의 운임회복 성공에 힘입어 대부분의 국적선사들이 올해 들어 흑자경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려해운은 올해 실적이 사상최고치를 달성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올해 BDI 1천선 넘긴 날 65일뿐
반면 벌크선 시장은 그야말로 사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계속 펼쳐지고 있다. 리먼 사태로 해운시장이 붕괴된 바 있는 2008년보다도 시황이 더 안 좋다는 게 벌크선 시장의 전반적인 평가다. 올해 2월엔 BDI가 647로 사상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전 최저치였던 2008년의 12월10일의 691을 3년여 만에 경신했다.
올해 들어 BDI가 1000포인트를 넘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1월 초와 4~5월, 7월, 10월 하순께 BDI가 1000포인트를 웃돌았다.
11월6일 현재 전체 209영업일 중 65일에 불과하다. 올해 10분의7가량은 1000포인트 아래에서 BDI가 움직인 셈이다. 그야말로 사상 최악의 시황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BDI는 지난달 19일 7월 말 이후 약 석 달만에 1000포인트선을 회복했다가 보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이달 1일 다시 1000포인트선 아래로 떨어졌다. 중소형선의 약세와 건화물선 시장 상승을 이끌었던 케이프사이즈 시황이 하락세로 전환한 게 원인이다.
사실 1000포인트는 선사들의 손익분기점보다 한참 아래다. 선사들은 수익을 낼 수 있는 BDI 수준을 2000포인트 이상이라고 얘기한다. 중소형선사의 경우 2500포인트대를 손익을 가르는 마지노선으로 들고 있다.
최근 몇 년간 국제유가가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어 선사들이 감내할 수 있는 운임 수준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올해 들어 BDI가 세 자릿수대에서 움직이다 보니 네 자릿수인 1000포인트 회복이 건화물선 시장의 관심이 되고 있다. 현재의 BDI 수준은 벌크선사들이 수송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11월6일 현재 연평균 BDI는 917을 기록 중이다. 현재의 분위기가 이어질 경우 올해 연평균 BDI는 1000포인트선을 넘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연평균 BDI는 2009년 2558에서 2010년 2736으로 소폭 상승했다가 지난해 1549로 크게 떨어졌으며 올해는 추가 하락할 것으로 점쳐진다.
시황 약세로 벌크선사들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한계 상황에 봉착했다는 말들이 시장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폐업한 선사는 50여개사에 이르며 법정관리를 신청한 곳도 11곳에 이른다.
“선박 팔아도팔아도 해답 안보여”
법정관리를 신청했던 선사들도 올해 들어 무더기로 파산 수순을 밟고 있다. 2월 말 씨와이즈라인을 시작으로, 삼호해운 월천통상해운 세림오션쉬핑이 줄줄이 법정관리 폐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달 말엔 티피씨코리아마저 법원으로부터 회생절차 폐지 결정을 받았다. 벌크선 시황이 바닥까지 떨어지자 법원에서 채무 변제가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법정관리를 신청한 11곳의 선사 중 삼선로직스 대우로지스틱스 등 조기 졸업한 2곳과 현재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대한해운 봉신 2곳 등을 뺀 7곳이 모두 폐지되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렀다.
월천통상해운은 올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가 시황 침체로 재기의 기회를 노려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파산에 이르게 됐다. 1996년에 설립돼 올해로 16년째를 맞은 이 선사는 지난 4월26일자로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뒤 5월17일에 회생절차 개시 결정을 얻어내 기대감을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관계인 집회 연기 등 회생계획안을 두고 진통을 겪다 결국 8월13일 폐지 통보를 받고 말았다. 법원은 사업을 청산할 때의 가치가 사업을 계속할 때의 가치보다 크다는 걸 회생절차 폐지의 이유로 들었다.
티피씨코리아는 그야말로 회사 정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한 선사다. 지난 2009년 7월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한 뒤 이듬해 7월 회생계획안이 채권단의 인가를 받으며 법정관리를 진행했다. 하지만 2년이 흐른 뒤 해운 불황의 깊은 골을 극복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법정관리 인가 뒤 삼진조선에 소유권이전부나용선(BBCHP) 방식으로 발주한 6척의 핸디막스급 벌크선을 인도받는 등 영업의 발판을 다지기도 했으나 선박대금을 갚지 못해 모두 회수조치 당했다. < TPC삼진 > < TPC롱뷰 > 등 삼진조선으로부터 인도받은 3만3500t(재화중량톤)급 선박 6척은 지난 5~7월 사이 캐나다선사인 페드나브인터내셔널에 매각됐다.
현재 법정관리를 밟고 있는 대한해운과 봉신도 어려워진 시황에서 자금 확보가 어려워지자 자산 매각에 나서고 있다. 대한해운은 지난해 케이프사이즈 선박 2척을 매각한 데 이어 올해 전용선 서비스에 투입되고 있는 선박을 제외한 나머지 사선들을 처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7만6천t급 <벌크차이나>호는 모나코 선사인 C트랜스포트에, 18만t급 <베고니아>호(<위닝컨피던스>로 개명)는 중국 위닝쉬핑에 매각됐다. 대한해운은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사옥과 자회사인 광양선박을 처분하기도 했다.
봉신은 지난 10월 8400t급 <오리엔틀케미>호(<테브라>로 개명)를 아랍에미리트 선사에 팔았으며, 980t급 LPG(액화천연가스) 탱커선인 <원진1>호 매각을 추진 중이다. 봉신은 나아가 회사를 인수·합병(M&A)하는 것도 꾀하고 있으나 부진한 해운시황으로 여의치 않은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중견 해운회사인 창명해운은 패스트트랙 협상으로 해운업계의 핫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 회사는 가까스로 은행권과 상환 연장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의 해운사 지원 프로그램 도입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재 해운업계에서 요구하고 있는 해운업 지원책은 단기 유동성 지원 방안으로 ▲채권 담보부 증권제도(P-CBO) 도입 ▲해운사 회사채신속인수제도 ▲장기회사채 또는 전환사채 발행 지원 ▲국가필수국제선박을 활용한 참가적 우선주 발행 지원 ▲해운사 스탠바이 LC 계좌 개설 지원 ▲해운사 긴급지원 브리지론 ▲패스트트랙 프로그램 개선 ▲캠코(자산관리공사) 선박매입프로그램 확대 등이다.
벌크선사 한 관계자는 “지금 상황은 선사들이 자구적으로 일어설 수 있는 상황을 벗어났다”며 “대규모 도산사태를 막기 위한 현실적인 정부 지원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해운 불황 속에서도 한국선주협회 회원사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선주협회 회원사는 올해 초 187개사에서 이달 현재 193개사로 늘어났다. 지난해 수준을 다시 회복한 것이다. 해운 시황은 끝 모를 침체를 이어가고 있지만 회원사 수는 오히려 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해운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 몇 년 간 수십 곳의 선사들이 도산했지만 이름만 바꿔 다시 시장에 진입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며 “신규업체가 계속 설립되면서 해운시장의 경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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