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아직도 얼룩진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저마다의 잣대로 평가를 일삼는 12.12사건.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을 계기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해서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지휘관을 교체하는 등 내부개혁의 진행 과정에서 정치군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군 내부에서 부각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하극상을 감행하여 불법적으로 군권을 장악한 사건으로 회자됐고 이는 제5공화국 탄생의 단초가 됐던 것.
한편 협회 사무국은 김선모 상무이사 타계로 인한 임원 충원을 위해 ’79년 7.31일 임시총회를 거쳐 전술한 최재수(崔在洙) 전무이사를 새로 선임하고 또 조기형(趙基衡) 업무부장과 장준기(章竣奇) 총무부장을 상무이사로 승진 선임했다.
다음해 초 퇴임하기까지 김용배 이사장과 신임 최재수 전무이사 그리고 임원으로 승진한 조기형 상무이사 및 장준기 상무이사 체제로 재편되어 새로운 진용을 갖춰 출발하게 됐다.
고시를 패스한 엘리트 관료출신 최재수 전무이사는 당시 약관 45세의 젊은 나이에 비해 성장기의 한국해운 밑그림을 그리는 제반 정책업무에 직접 관여한 탓에 실무에 밝은 이점과 업계의 변혁을 모색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협회의 조직이나 기능을 십분 활용하기에 유리했다.
김이사장은 부임초기 보다는 현격히 줄어들긴 했지만 임기말에도 가끔 보이는 돌발 성격이나 행동은 여전했다. 한번은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나이든 퇴임 말년의 고참 사무관을 협회 간부로 받아달란, 당시로선 흔히 있을 수 있는 요청을 받고는 “여기가 쓰레기통이냐”고 전화를 끊고도 분을 못 삭여 취임 축하선물로 동서해운의 양재원 사장이 보내 진열돼 있던 금빛 찬란한 모조 금관을 사정없이 집어 던져 유리포장과 함께 박살을 내는 바람에 온 사무실에 튀긴 파편을 쓰레받기와 빗자루로 치우며 아찔했던 생각이 난다.
최전무는 근무 영역이나 경험이 서로 다른 김이사장과는 묘한 갈등이 있어 보이기는 해도 역할 분담을 통해 이를 슬기롭게 피해가며 이듬해 초에 두임기 4년을 마치고 떠난 김이사장과는 큰 트러블 없이 1년도 채 못되는 동거(?)를 끝내는 지혜를 보였다.
'79년 당시 최규하(崔圭夏) 제10대 대통령이 취임하긴 했으나, 실권은 신군부세력에게 있었다.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 사망후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정호용(鄭鎬溶) 등의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이 주도하여 정국이 운용됐던 것이다.
1980년 4월 사북탄광 노동자 파업, 5월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5월 17일 신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5월 27일 계엄군을 광주(光州)에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났고 5월 31일엔 국가보위비상태책위원회(國保委)가 발족되고, 9월 1일 전두환 제11대 대통령이 취임하게 된다.
그해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12월 초 민주정의당(民正黨)·민주한국당(民韓黨)·한국국민당(國民黨)이 창당되었고, 1981년 3월 3일 전두환 제12대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정식 출범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 전문과 12장 126조 및 부칙 11조로 되어 있던 유신헌법은 삼권분립, 견제와 균형이라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대한 전면부정과 대통령에게 권력집중 및 반대세력의 비판에 대한 원천봉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주요 내용은 법률 유보조항으로 국민기본권의 대폭 축소, 입법부의 국정감사권 박탈과 연간 회기 제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에 의한 국회의원 1/3 선출, 사법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정치적 헌법보장기관인 헌법위원회로 개편, 긴급조치권 및 국회해산권 등 대통령에게 초헌법적 권한 부여, 6년으로 대통령 임기 연장과 중임제한조항 철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 헌법개정절차의 이원화, 통일 이후로 지방의회 구성 보류 등이 주요 골자였었다.
그러나 1인 장기집권을 배격하기 위해서 대통령의 임기를 7년으로 하고 중임을 금지했다. 국회의원의 1/3을 대통령이 추천하게 한 제도를 폐지하고, 국회의 권한을 강화했다. 또 대통령의 일반법관 임명권을 폐지하고 대법원장이 그 권한을 갖게 함으로써 사법부의의 독립성도 강화했다. 그러나 저러나 색깔이나 모양이 크게 달라진건 없었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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