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김 이사장의 두번째 임기 ’78~’79년은 다른 산업분야와는 달리 해운은 이란 정정불안에 따른 제2차 석유파동으로 장기 침체를 벗어나지 못 했으나 ’79년 하반기 들어서는 다소 회복 기미를 보였다.
국적 외항 상선대의 운임수입이 사상 최초로 10억 달러대를 돌파, 12억7천만 달러를 기록했고 국적선 적취율도 47%라는 높은 신장세를 보였었다.
그러나 연중 신규로 늘어난 선사는 하나도 없는 반면 남양해운, 동양상운, 율산해운 등이 도산되고 한일해운만이 모기업 코리아라인에 간신히 흡수합병 됐다.
그 밖에도 경영상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뉴아세아해운이 대봉그룹으로 경영권이 넘어가 대운상선으로 개명이 됐고 삼신해운은 한양공영으로 흡수됐으며 현대양행은 한라해운으로 독립적인 운영체제를 새로이 갖추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서도 보유선복량은 꾸준히 증가, 총 415척, 368만톤을 기록, 전년비 15%가 웃도는 증가율을 보였다.
70년대를 마감하는 그 해에 한진해운은 북미서안 항로에 풀컨테이너선 4척을 투입하여 서비스를 대폭 강화했고 대한 해운공사는 구주항로에 풀컨선 2척을, 동서해운도 1척을 투입해서 미주, 구주, 중동, 동남아 항로에 취항하는 풀컨선은 모두 12척 27만6,348톤이나 되는 선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조양상선과 동영해운은 자사 선박 투입 없이 호주항로를 새로 개설, ANL(Autrallia National Line)과 공동 제휴하여 그해 12월부터 컨테이너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듬해 1980년엔 풀컨선 <코리아 찬스>와 <코리아 로드>를 투입함으로써 본격적인 국적선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김용배 이사장도 4년차 근무의 경력을 쌓자 해운의 국제적 지위 향상의 중요성을 크게 절감하고 1차로 국제기구 ICS(International Chamber of Shipping/국제해운회의소)에 가입을 했고 이를 계기로 필자도 체격에 맞지 않는 턱시도를 빌려 입고 몇 차례 런던 총회에 참가했던 기억과 그 밖에도 IMO(국제해사기구) 등 해운의 종주국 런던의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겪었던 실수와 에피소드는 단순한 ‘히드로 공항’의 추억이기 이전에 지금도 진한 노스탤지어가 묻어나는 향수요 그리움으로 오래 남는다.
해운항만청을 위시한 해운관련 정부당국은 잰걸음으로 한/덴마크 이중과세방지협약을 발효시키고 북평항을 개항장으로 지정하는가 하면 선원과 선박과 검사측도과 등을 묶어 선원선박국을 신설했다.
또 해운진흥법 시행령을 개정, 웨이버업무 관련 지정화물을 명확히 규정하고 부산항 제2단계 개발사업도 착공했고 해양오염방지규칙도 제정 공포하는가 하면 한미 해운 실무회담도 개최하고 선원장학회도 그 해에 설립, 지금의 해양재단으로 이어오고 있다.
그 밖에도 해운업 조기 육성을 위해 제정된 해운진흥법(해운산업육성법)을 개정하고 해운진흥기금 조성의 법제화와 도입선박의 부가가치세 면제조치를 단행했으며 P&I(선주상호보험) 세미나 개최, 불황극복 지원대책으로 선가상환 부족자금 특별융자기간 연장조치를 하고 해상에서 수고하는 선원가족들을 격려하기 위해 푸짐한 위로연을 베푸는 행사에도 정성을 들인 한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979년엔 근대화로 치닫던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10월26일 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는 변란을 맞았다.
김용배 이사장은 전 직원의 문상을 독려했고 필자도 내자와 두 아이를 데리고 국화꽃으로 장식된 청와대 빈소를 찾아 분향 대열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총격으로 육영수여사가 떠난 길을 5년 뒤 자신도 그 뒤를 따라 떠난 것이다.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산업 전반이 소용돌이 치며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12월21일을 기해 외무장관을 거쳐 국무총리직을 수행하던 제10대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취임했고 이어 ‘12.12사태’란 시국으로 이어져, 온 나라가 베일에 쌓인 채 시끌시끌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12.12사태란 1979년 12월12일 전두환(全斗煥)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이끄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 내부의 무력충돌을 일컫는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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