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업계 시니어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며 그 이름 석자는 가슴을 찡하게 한다. 심지어 당시 업계를 쥐락 펴락 하던 주무부처 고급 관리들도 김상무의 해운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나 백의종군 하듯한 노력과 열성에 탄복해서 되레 식사나 주안상을 대접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리고 해운계의 1923년, 계해년(癸亥年) 출생들이 ‘해돈회(海豚會)’란 동갑모임을 만들어 선주협회 강상혁 상무, 김선모상무, 김희석(金熙錫) 상무, 선박대리점협회 김유경(金裕卿) 전무, 윤인석(尹麟錫) 에베렛기선 및 기독교방송 사장 등이 모임을 갖고 친목을 다지던 모습이 기억나고 김용배(金容培) 장군도 동갑이긴 했으나 함께 어울리진 않았었고 생존했다면 금년 아흔수가 됐겠다. 12년 아래 띠동갑 최재수(崔在洙) 전무이사도 같은 돼지띠니 “나도 준회원”이라 했던 농담도 생각난다.
또 당시 일본서 해운에 미친(?) 사람으로 해운집회소 발간, 역사와 전통이 깊은 월간지 ‘가이운(海運)’의 편집장을 오래 했고 나중에 타이완 ‘에버그린’의 동경지점 이사를 지낸, 필자와도 가끔 만난, 학자풍 해운인이 있어 항간에 일본에 ‘이노마다 야쓰오(猪悅夫)’가 있다면 한국엔 ‘김선모 상무’가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오로지 해운에 몸바쳐 외길만의 족적을 남기고 떠난 인물이었다.
하늘의 별 보다 더 높다고 자처하던 김용배 예비역 대장도 동갑의 직속 부하인 김상무에겐 늘 숙연한 자세를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편 이 때를 전후해서 필자가 맡은 조사부에는 ’78년들어 작은 변화가 생겼다.
교통부 해운국시절 목포지방 해운국에서 근무한 경력에다가 필자보다 11세나 위여서 일제 강점기 중학교 과정까지를 수학, 일본어 해독이 가능해 조사부 출범시에 필자와 함께 참여했던 김용문(金溶文) 과장이 이직하는 바람에 일어 해독 가능 대타를 찾던 중에 김화형(金華炯)과장을 뽑아 그동안 요긴하게 필자와 손발을 맞춰 당시 해운계에 크게 사랑받던 협회보를 잘 만들어 오던 터였다.
그러나 갑자기 김용배 이사장은 후임 김과장을 신설한 부설 기구인 ‘해운정보센터’로 이동발령을 내고 수평이동을 시킨 것이었다. 옮겨간 김과장 역시 나이는 11세나 연배였으나 품성이 온순하고 연령에 관계없이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위계질서를 철저히 준수할 줄 아는 육군 화학단 근무경력이 있는 영관급 통역장교 출신으로 일어에 영어까지 능통하고 대학신문 경력으로 편집기능까지 갖춰 필자에겐 보배같은 존재였으나 감히 누구 명령이라고 이를 거역할 수 있었으랴.
별도로 기억나는 사무실의 화제 한토막도 있다. 김과장은 아들만 둘을 뒀는데 당시 대학 수능시험이 학과 320점 체능 20점으로 합계 340점이 만점일 때 한 해 차이로 두 아들이 320점대를 취득해서 가난한 경제단체 과장 아들이 최고수준의 국립 의과대학에 입학했던 일이다.
그때가 아니고 지금이라도 자녀가 서울의대에 간다는 건 분명 가문의 영광(?)이요 자신의 영예임에 틀림없는 일이 아닐 수 없을테니 말이다. 협회보 제작에 일어 번역기사를 도와주던 강상혁 상무가 떠나고 새로 온 김희석 상무는 국제업무만 보다가 그나마 정보센터로 자리와 업무를 옮겨가고 김화형 과장마저 데려가고 보니 필자 혼자서 매주 20여쪽 이상을 발간해서 배부해야 하는 부서업무를, 통계를 맡았던 지금 협회의 총무이사, 이용주(李龍珠) 계장과 둘이서 꾸려나가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됐었다. 급히 또 새 사람을 다시 뽑아야 할 화급한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기자 출신이라야 당장 실무에 투입할 수 있겠기에 성급하게 저널리스트 출신 중에서 적임자를 물색중이던 차에 운임동맹 성격의 협회 부설기구 ‘선주중립위’의 이홍택(李鴻澤) 상무가 어떤 채널을 통해서였는지 필자에게 이력서 한장를 건네는 게 아닌가.
경복고와 성균관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아방송과 동아일보에서 활동하다가 퇴직한 1941년생 이규만(李奎萬)으로 퇴직후에는 자유업으로 레스토랑 경영과 전 김학렬 부총리 부인이 운영하던 ‘학림라켓’ 상무이사를 역임한 것으로 파악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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