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김용배 이사장은 군사정권 시절인데다가 4성장군 육군참모총장이란 경력으로 낙하산을 타고 육군이 해군(해운)영역(?)에 배정된 돌연변이적 특수 케이스에 실무형이 아니기도 했지만 본인도 늘 “나는 큰 것 몇 건만 해결하면 되니까 그밖의 제반 업무는 여러분들의 업무분장대로 알아서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라”라는 게 지휘 방침이었다.
그래서인지 일상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루틴업무는 일일이 파악도 힘들겠지만 아예 알려 들지도 않고 보고만 받았고 어쩌면 그렇게 일임하는 것이 실무자들에겐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계기도 되고 마음도 편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주무 부처의 국장급들이 업무상 전화를 해도 버릇없이 격을 모르고 함부로 전화질이냐며 바꿔 주기가 무섭게 끊어버리던 일들은 정부에 목을 매는 실무자들에겐 섬뜩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라 공포에 질리던 일들이 다반사였다.
앞서 언급한 결혼식이 끝난 며칠 뒤의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급히 불렀다. 대통령 휘장이 선명한 돈봉투, 즉 결혼 축하 금일봉을 받아와 “각하께서 직접 하사하셨다”며 좋아하던 모습과 붓글씨에 능해 평소부터 왠간한 메모까지도 가는 붓을 이용, 서예로 하는 습관이 있는지라 즉시 대통령에게 깨알같이 감사하단 답글을 써 필자에게 교열을 의뢰하던 생각도 떠 오른다.
말로만 듣던 대통령이 하사하는 금일봉을 처음 본 터라 모두가 신기한듯 돌려가며 쳐다보고 냄새까지 맡아보던 기억도 난다.
또 하나 짚어 볼 추억은 ’77년 ‘제1회 해운의 날’이 항만청 개청 이래 첫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치른 기억이다. 주빈으로 김종필 총리를 이은 최규하 국무총리를 섭외했으나 여의찮았고 대신에 육군 참모총장 출신 최경록 교통부 장관을 모셨던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 보안사령관 출신 강창성 항만청장 주관에 선주협회장 이맹기 해군 참모총장,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대장 등이 주최로 요란하게 장성출신 별들이 운집했다. 특히 필요 불가결한 국가 경제의 버팀목 수출을 뒷받침하는 해운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사해약진(四海躍進)’이란 친필 휘호를 해운업계에 써 보냈다.
제한적으로 사본을 액자나 표구로 만들어 업계 대표들에게 나눠주고 이를 맡았던 필자도 한 장를 챙겨 40여년이 가까운 지금까지도 가보(?)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해운관련 단체들을 중심으로 행사경비를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연간 예산을 기준으로 갹출해서 서울과 전국 항만도시를 중점적으로 요지의 길목이나 육교마다 현판이나 현수막을 걸어 해운의 날을 알리는 대대적인 홍보물을 내 걸었다.
산업훈장, 금탑이나 은탑·동탑을 서로 타려고 공적서 작성 등 이의 중간 역할을 맡은 선주협회를 통해 로비(?)를 해오던 업체들과 인물들, 누구 누구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초청자 명단엔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외에 교통부 장관을 지낸 백선엽, 장성환, 김신, 민병권, 황인성, 유양수, 차규헌, 윤자중장군등 군출신이 많았고 행사 장소는 광화문 소재 세종문화회관을 사용했으며 기념 리셉션도 부설 세종홀을 다 터서 1,000여명 이상의 손님을 맞아 스탠딩 부페로 잔치를 치렀다. 필자가 전 행사의 실무 책임자로 무려 몇 개월에 걸쳐 홍보나 잔치 준비를 했고 소요시간 계산을 위해 주빈의 동선까지 발걸음으로 재던 일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중에는 정부의 각종 행사 간소화 방침에 따라 축소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날밤을 새며 매년 수차례에 걸쳐 준비과정을 점검하던 일이 엊그제 같고 주빈으로 진의종(陳懿鐘) 총리를 모시던 해에는 행사장의 사전 안전 및 보안검색은 물론 출입 비표 준비를 철저하게 하여 신경을 곤두세우며 밤을 새던 기억도 새롭다. 모든 일은 선주협회가 도맡게 마련이었다.
요새는 각종 크고 작은 정부 행사시에 단상에 오르는 요인(VIP) 숫자를 대폭 줄이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만 해도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때여서 그런지 몰라도 제일 골치 아픈 문제가 행사장 단상에 오르는 직위나 직급을 중심으로 누구를 올리느냐와 주빈을 샌터로 해서 서열을 정하는 문제였다.
같은 단체장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캐리어까지를 고려하는 일이 참으로 어려웠고 사전에 자리배정 정보가 누설되어 이에 불만을 품고 행사참석을 보이콧 하는 사례마저 허다했다. 도토리 키 재듯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놀음이었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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