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채명신(蔡明新) 장군은 온화해 보이면서도 짙은 눈썹 아래로 빛나는 눈매나 눈빛이 매서워 제복을 벗고 사복을 입은 외교관임에도 현역시절, 지장(智將)이요 용장(勇將)에 맹장(猛將)이기도 했던 실전, 특히 야전에 강한 군인이란 특징이 뚜렷한 인상이었다.
전사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 제8사단의 대대장(소령)으로 참전하여 평북 영원지방까지 북진했다. 그러나 1950년 11월 중공군의 대거 기습 참전으로 통일의 문턱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의 길에 접어든 뒤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남하를 계속하여 강화 유격대의 도움으로 강화도에 상륙하게 된다.
이어 육군 정보학교에서 교육 중인 육본 직할 결사 제11연대장이 되어 363명을 지휘하여 51년 1월부터 4월까지 홍천군, 인제군,양양군 등지에서 적의 지휘소습격, 보급로 파괴, 적 연락장병의 생포, 민간조직의 파괴 등 유격 특수전을 감행한 한국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용감성을 발휘한 지휘관으로서 후일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여 초대 주월사령관으로 임무를 마친 후 이세호(李世鎬) 장군에게 바통을 넘겼던 것이다.
당시 베트남전의 국군파병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사령관으로 임명된 배경은 역시 실전경험과 야전군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란 것. 미군 연합작전과 유격특수전의 대가인 만큼 베트남전을 두고 볼 때 가장 적절한 인선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자의건 타의건 파월명단에 올려 오음리 등에서 훈련을 받던 일부 지원자들이 실제 상황이 닥치기도 전에 지레 질겁을 하고 훈련장을 이탈하거나 탈영하는 사례가 빈번하자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있다고 강조하며 “죽을 사람은 월남서도 죽고 국내에서도 죽는다”고 싸움터에 나가는 군인이 생명을 아끼면 전쟁의 승리는 어렵다는 걸 일깨웠다고 한다.
사령관 재직시 월남전에서의 지휘방침도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덕장의 면모를 갖춘 장군으로도 존경받았다. 당시 맹호부대장으로서 파월사령관을 맡았지만 맹호부대가 수많은 작전의 성공으로 한국군은 미군도 인정하는 강한 군대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야전군 사령관의 지휘력을 발휘했다.
육사는 46년 5월 서울 근교 태릉서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교한 이래 51년 4년제 정규 사관학교로 승격, 재출범했다. 48년 4월 제5기로 임관한 채장군은 38사단장, 5사단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제1군단장, 3관구사령관을 역임했다.
이어 주월·한국군 사령관, 2군사령관을 역임하는 등 평생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고 3성장군, 육군중장으로 퇴역했으며 태극무공훈장과 월남최고훈장 등을 받았다. 6.25전쟁 후 실전 장기간 대규모 전투에 참가하여 사령관직을 수행하였기에 그 전공과 명예는 후배 군인들에게 영원한 지휘관으로서 귀감을 보인 야전군인으로 국민들 가슴에 오래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김 이사장은 후배 장성 중에서도 채명신 장군을 가장 덕장으로 꼽으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스웨덴 대사에 이어 브라질 대사 시절 사무실을 찾아오면 간부들에게 일일히 소개를 시켰고 채 대사는 올 때마다 꼭 커피의 종주국 브라질의 현지산 원두커피를 가져와 산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머나먼 남미 기호품의 향취를 전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선물을 받는다는 게 신기하기 이를 데 없고 자랑스러웠다.
얘기를 바꾸어 유신 이후 70년대 중반에는 인사적체 해소 및 취업알선을 위해 각 군의 잉여 고급장교 중 영관급을 퇴역시켜 정부 부처나 경제단체 및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에 어김없이 비상계획관 또는 비상계획부장이란 보직을 맡겨 군출신 고급인력 재활용 방안으로 활용했었다.
김 이사장이 부임하기에 앞서 한국선주협회에도 중앙정보부(CIA) 출신 최덕연(崔德演) 대령이 부임했다.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中情)’의 제7국 부국장과 울산분실장을 지냈다는 최대령은 속칭 말똥(?) 셋의 대령 출신이지만 군대는 보직이 최고라 했던가 현역시절 파워가 대단했었고 육군하사 그것도 일반하사 출신 필자가 보기엔 너무나 가당찮은 인물이었다.
얇실한 얼굴에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실눈(Slit Eyes) 형의 눈매 하며 구사하는 언어나 대화내용이 온통 이북말이 흠뻑 밴 똑부러진 말투로 왕년의 핵심 정보요원으로서의 끗발 타령을 늘어놓으면 걷잡을 수가 없었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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