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북한군이 불시에 남침을 개시하자 전쟁이 발발하여 순식간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었고 이때 제7사단은 미 제10군단과 함께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6월25일부터 938 선우고지 전초진지 쟁탈전을 펼친 끝에 미 제45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후 제2군단으로 배속되어 다시 화천지역에 투입되었다.
그 후 김용배 소장은 별우지구의 425고지 및 406고지 전초진지 쟁탈전을 벌이던 중 1953년 7월27일 휴전을 맞는다.
휴전협정 조인으로 6.25전쟁이 일단락된 53년 8월27일 제7사단장 김용배 육군소장은 제8사단 21연대장으로서 재임중 수행한 영천지구 전투를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탁월한 작전능력과 통솔력을 발휘함은 물론 뛰어난 전과를 수립한 공로를 인정받아 군인으로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최고의 서훈,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1호)를 수여 받게 된다.
59년 제1군단장에 이어 제5군단장 역임후 61년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경력을 늘 자랑스럽게 시간 날때마다 자주 되풀이 했고 직전 참모총장 민기식 대장에 이어 후임으로 총장을 역임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7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세상에 알려진 김계원 장군 이야기도 간간히 하곤 했다.
특히 참모총장 재임 기간중 우리나라 역사상 세계사적으로 가장 괄목할 획기적인 군사 및 외교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월남전 참전을 국군 통수권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육군의 수장으로서 엮어낸 일이라 하겠다.
당시 미국의 개입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필자 역시 제대 말년 쯤에 잘 못하면 월남전에 강제 징집되는게 아닌가 은근히 두려워 했던 생각이 난다. 여하간 월남파병으로 군 뿐만 아니라 아니라 온 나라가 떠들썩 하던 때를 남달리 기억하고 있다.
참전 초기, 파병 부대 순서는 잘 모르지만 공병 건설지원단으로 기억되는 비둘기부대가 선발로 파견되었고 이어 해군수송 백구부대, 다음 전투부대인 수도보병사단 맹호부대와 그리고 보병9사단 백마부대, 그밖에 해병제2여단 청룡부대를 파병하여 대한민국 국위와 국방력과 우리 국군의 위용과 명예를 전 세계에 과시했었다.
육군으로 병역을 필한 70년대 이전의 사병출신이라면 미군들 체격에 맞춰 제작된 개인 소총화기 M-1이 한국군에겐 얼마나 다루기 힘든 병기였는지 대개의 경우 누구나가 사연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필자같이 단신 체구로는 휴대하고 행군을 하거나 사격시에 짧은 팔로 거총을 하기가 그 얼마나 힘들었든지 지금도 몸서리칠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당시 몇몇 파월 친구들이 한국군에도 우리에겐 환상의 차세대 병기로만 생각했던 M-16을 지급받았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필자도 다시 입대해서 전방에 배치되어 날렵하게 가볍고 성능 좋은 M-16을 지급받아 초소근무를 해 봤으면 좋겠다 하고 부럽기까지 했던 기억도 회상된다.
막강 한국군의 위세를 드높이며 미군과 함께 월남전에서 베트콩 격멸의 주역을 맡아 맹위를 떨칠때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하는 군가와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온동네 잔치하네”하고 부르던 파월장병 칭송 가요가 유행하던 기억도 새롭다.
매일 앞다투어 방송이나 신문의 뉴스보도에 사이공, 퀴논, 다낭 전투와 전과가 어떻고 또 디안, 나트랑, 하노이, 붕따우 전세가 저떻고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언 40년이 훨씬 넘게 후딱 갔으니 세월무상이 여기서도 엿볼 수 있는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대장이 협회 사무실에 매일 출근을 시작한 이후로는 퇴역 고급장교들과 전역 장군들이 자주 들락거렸고 가끔은 별을 단 후배나 옛 부하 현역 장성들도 끊이지 않게 예방의 줄을 이었다.
그 중에도 크게 기억나는 분이 있다. 바로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역임한 ‘야전군의 전설’ 또는 ‘영원한 야전 사나이’로 불리는 채명신 장군이다.
자서전 ‘사선을 넘고 넘어’에서도 밝혔듯이 1926년 황해도 출신으로 48년 4월 육사 5기로 임관하여 육군참모대학을 거쳤고 6.25때 제7사단 5연대장 시절 양구전선에서 난공불락의 적의 고지를 섬멸시켜 전공을 세운 채 장군은 필자가 전방에서 현역 군복무 시절에도 이름이나 명성만은 익히 알고 있던 터다.
주월사령관 재임후 '72년 2군사령관을 끝으로 스웨덴 대사에 이어 브라질 대사로 있으면서 일시 귀국시마다 선주협회 사무실로 김용배 장군을 예방해서 깍듯이 모시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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