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예비역 대장이 이사장으로 부임 후 늘 무언가 불안한 마음으로 숨소리를 죽여가며 지내던 어느날 드디어 갑자기 시한폭탄이 터졌다. 그간은 승용차 한 대로 카풀제를 운용하듯 상근부회장, 전무이사, 두 상무이사 등 상근 임원 넷과 필자가 편승하고도 큰 불편 없이 출퇴근을 해 왔었다.
그리고 김 이사장은 부임 첫 날부터 개인 소유 승용차와 기사가 함께 따라와 며칠을 넘겼고 이어 긴급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결정된 사항이었던 예비역 대장 예우에 걸맞는 새로운 전용 승용차 구입은 진행이 됐으나 그 밖의 집무실 별도 마련과 부속실 확장과 전속비서 채용 등이 제대로 되지 않자 처음 며칠간의 단순한 분위기상의 비상상태는 실제 상황을 맞게 된 것이었다.
60만 대군을 거느리고 총 지휘한 육군참모총장, 그것도 별 넷 대장 출신을 해운업계가 육군 소위 소대장급으로 형편없이 강등시켜 홀대한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며 언성을 높이거나 자주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감정 기복이 심했고 정서불안 증상(?)이 있는 듯 하루에도 몇 번씩 “참모총장 육군대장 이퀄 투(equal to) 국방장관”이란 등식을 수도 없이 되뇌는 바람에 우리를 넘어올까 맹수를 두려워하듯 임직원들은 이사장 방문이 열리기만 하면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오싹오싹하며 겁에 질리기가 일쑤였다. 긴장감의 연속.
하긴 지금은 몰라도 당시로는 육군대장은 급여 기준으로 볼 때 국방부 장관과 동급이며 국립대 총장은 문교부 장관과 동급이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병력수로나 전력면에서 단연 세계에서도 굴지인 ROKA(Republic of Korea Army), 대한민국 육군의 총사령관 참모총장이 일개 소대 병력에도 못 미치는 인원에다가 손바닥만한 사무실하며 어느 것 한가진들 성이 찰 수가 있었을까 필자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일응 수긍이 가기도 한다.
전전긍긍하며 살얼음판을 걷듯 며칠을 숨죽이고 지내던 가운데 급기야 어느 날 진짜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해운업계가 도대체 사람을 몰라 본다며 갑자기 책상 위에 놓여있던 이사장 명패를 내동댕이 친 후 집어 던지고는 불과 부임 며칠만에 그만 두겠다며 건물이 무너지게 출입문을 쾅하고 닫고는 휑하니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앞서 언급했듯이 직책상 해군참모총장 출신 이맹기 제독이 협회 회장이기에 회장명을 받아 업무를 집행하는 육군참모총장 출신 김용배 장군과는 종속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 이사장은 자주 해군이나 공군 참모총장은 육군의 군단장급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았다.
현역에서 퇴역한 지 오래 됐음에도 두 사람이 은근히 왕년의 세를 과시하며 으르렁 대듯 하며 기싸움을 하는 모습들이 며칠 가지도 못하고 찢어지게 된것이었다. 어떤 경로를 거쳐서였건 간에 어렵게 모시긴 했으나 제대로 대우를 못 해주는 바람에 협회 사무국 수장 자리가 공석이란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자 당시 협회 운영에 깊이 관여하던 주요선사 CEO급들이 급히 시태수습에 나서서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지금도 역역히 회상된다.
그 중심에는 당시 고려해운 신태범(愼泰範) 부사장(현재 KCTC 회장), 조양상선 박효원(朴孝源) 부사장(은퇴), 흥아해운 조희량(曺禧亮) 전무이사(작고)등 몇몇 핵심 인물들이 오너인 사주를 대신해서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해운계의 민간부문 최고의 중심조직이라 할 수 있는 선주협회를 좌지우지하는 분들이라 사태수습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자마자 며칠만에 짐을 싸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김 이사장이 스스로 다시 찾아올 리는 없으려니, 숙의 끝에 회유와 설득을 거쳐 대우 문제와 더불어 자존심 계속유지 명분이 주효했던 듯 다시 출근을 해서 집무실 책상에 정좌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우선 급히 넓혀 갈 사무실을 물색 끝에 서소문동 소재 배재학교 재단이 운영하는 건물 ‘배재빌딩’ 10층으로 결정하고 이사를 했다.
주위에는 덕수궁을 비롯, 서초동으로 법원이 옮겨갈 무렵을 전후해서였으니 대법원과 미국대사관저, 성공회, 정동교회, 중앙일보, 신아일보, 맞은 편에는 동화빌딩, 유원건설, 동아건설 등이, 뒷길로 나가면 정동극장, 이화여고, 문화방송(MBC)과 경향신문사가 있고 바로 광화문·독립문쪽으로도 연결돼 도심치고는 종로나 을지로보다는 훨씬 덜 복잡하고 비교적 편리한 위치에 자리한 10층짜리 건물이었다.
지금도 그 앞을 자주 지나가면 ‘옛 한 때는 저 빌딩서 근무했었는데…’ 하고 왈칵 추억이 교차하며 떠오르곤 한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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