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이상에서 우리 한글을 두고 필자의 평소 관심사와 상식 그리고 관련자료 검색 및 국어원 상담사들의 도움으로 제법 우리말 전문가인체 자료를 정리하여 원고를 쓰면서 수십년간 소홀하고 무관심했던 우리글을 비교적 짧은 시간내에 집약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던 것 같아 흐뭇하다.
앞서는 주로 맞춤법이나 표준어 위주의 문법 공부를 했으니 이제 우리 일상 생활에서 오용되는 글이나 말을 두고 제목에서 밝힌 대로 그 실제를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수필적으로 접근하여 2~3회에 걸쳐 가볍게 살펴보고 졸고 연재를 끝냈음 한다.
1. 인명·지명 정확히 발음 않고 적당히 부르는 잘못 많아
1956년생으로 워싱턴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제36회('94) 그래미상 시상식에 최우수 연주작곡상을 받고 우리나라에서도 수 차례 공연을 가져 음악 애호가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대대적인 호평을 받은 ‘색소폰’ 연주가 ‘케니 G’의 방한시 그를 일컬어 ‘섹스폰’ 플레이어라고 부르기도 해서 지상을 통해 비약된 어감이 작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외래어는 자음에 유념 ‘키타줄 사랑’은 ‘기타줄’로 해야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 하고 가히 세계적인 연주가로 칭송받고 사랑받는 데도 그가 연주하는 흔한 악기 이름인 ‘색소폰(Saxophone)’을 ‘섹스폰(Sexphone)’ 혹은 ‘색스폰(Saxphone)’정도로 쓰거나 발음하는 경우가 잦아 그의 연주기간 동안 ‘색소폰’은 자주 입에 오르내리면서도 혹자들에게는 ‘섹스폰’이 되는 불명예(?)를 면치 못했다.
물론 필자도 ‘라디오’를 ‘레이디오’로, ‘오렌지’를 ‘오린지’로 하는 식으로 외래어나 고유명사를 무조건 원음에 가깝게 표기하거나 발음하자는 절대 원음 신봉자나 원음 결벽증 환자(?)는 아니다. 그러나 양반 악기(?)에 속하는 색소폰이 음란 텔레폰이나 전화놀음으로 잘 못 불리우는 건 아무래도 외래어니 외국어니를 떠나서 바르게 써야 할 것임에는 틀림 없겠다.
이는 분명 문법이나 맞춤법 얘기가 아니라 적어도 고유명사의 대표격인 인명이나 지명 또는 기기의 이름은 가급적 어원(Origin)에 가깝게 익히고 적고 발음하는 게 국어사랑의 첫걸음이란 뜻에서 강조한다. 필자는 그 밖에도 들을 때마다 유독 강한 저항을 느끼는 몇 개의 단어들이 있다.
우리의 옛 가요 “키타 줄에 실은 사랑 뜨내기 사랑 / 울어라 키타여 나의 키타여!”에서 분명히 “키타”는 “기타(Guitar)”요 “기타 줄”이고 신나는 음악 “클라스를 채워다오 부기우기 부기우기”는 “클라스(Class)”가 아닌 술잔(혹은 안경)이란 뜻의 “글라스(Glass)”를 잘 못 알고 흥에만 겨워 마구잡이로 불러 젖히기 일쑤. 클라스나 글라스나 그게 그거라면 할 말이 없다.
또 또 몇개 더 있다. 191cm 장신으로 전설적인 서부 영화의 히어로요 총잡이의 대명사격 ‘게리 쿠퍼(Gary Cooper)’. 흔히들 서부의 광야를 질주하며 말을 타고 멋있게 라이플이나 쌍권총의 묘기를 보이는 그를 신나게 설명하면서 ‘케리 쿠퍼(Kary Cooper)’란 잘못된 이름을 연발한다.
채워야 제맛인 술잔‘클라스’는‘글라스’가 맞는 말
잉그릿드 버그만과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헬레 헤이즈와의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그리고 그레이스 켈리와의 ‘하이눈(High Noon)’이나 마리아 쉘과의 ‘교수목(The Hanging Tree)’ 등등 그의 주옥같은 서부를 무대로 한 영화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연거푸 수상한 경력까지도 꿰면서 필자의 가까운 친구들마저도 정작 그의 이름을 ‘케리 쿠퍼’로 부르는 걸 보고는 필자가 핀잔주기를 참을 수 있을까?
또 영화 애호가가 아니어도 영상 예술을 논한다치면 10년에 걸쳐 한 작품을 쓴 마거릿 미첼여사, 거장 빅터 플레밍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바로 그 대작이요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논외로 할 수 있으며 스칼릿으로 분한 비비안 리를 양팔에 덮썩 안고 레드 카펫 계단을 오르는 영화사상 불후의 명장면을 연출한 버틀러 역의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을 빼놓고 얘기가 가능할까?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과연 ‘클라크 케이블(Clark Cable)’이 아닌 ‘클라크 게이블’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전부일 것인지 아니면 앗차 그렇구나 하고 잘 못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을 바로 잡는 사람은 과연 전혀 없는 것일까도 궁금하다. 여하간 MGM사가 제작한 세계적 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자 주인공 버틀러를 연기한 명배우는 ‘클라크 게이블’이 맞다. 모음이 저지르는 인명의 발음들은 눈감고 넘어간다.
2. 마구잡이식 터무니 없는 언어의 이상 진화(異常進化)
결론적으로 외국어나 외래어 출처의 글이나 말이나 단어나 어휘를 그 어원에 가깝게 발음하고 정확하게 표기하는 건 절대로 편향된 무리수나 지나침 혹은 식자인체 하는 소모성의 현학적 태도나 거들먹거림이 아니라는 게 필자의 확고한 철학이다.
2011년 12월31일 이 원고를 쓰는 지금 이 시각 늦은 밤까지 모 지상파 방송국의 연기대상 시상식 행사를 듣고 있다.
신인상이나 조연상 주연상을 비롯하여 수상자 전부가 사회석에 나와 트로피를 받고나서 으레 정해져 있는 소감 발표 순서에 이르자 모두가 “아버지 어머니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이거나 “감독님 선배님 누구 누구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의 연발이었다. 그러니 필자의 신경은 시상 내용과는 무관했다.
‘바람과 함께~’의 ‘C 케이블’은 ‘게이블’이 바른 이름
근래에 ‘너무나’란 말이 제 자리를 못 찾고 지나새나 아무데고 남발되는 사례는 차치하고 글과 말과 연기를 팔아 장사하는 유명 방송국 심야프로에 그것도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선발된 전문 엘리트 스타 군단들의 수상소감이 “대단히 감사합니다”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를 못해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일색으로 사용되는 걸 보면 아예 우리말을 구사하되 동사의 자동사나 타동사 개념은 없는게 분명하다.
“감사”라는 명사에서 “감사하다”는 형용사와 “감사히”란 부사를 거쳐 “~에게 감사합니다”와 같이 자동사로 또 “감사히 받겠습니다” 또는 “감사를 드리다” 같이 타동사로까지 활용되는 과정을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데도 “너무나”와 같은 부사의 기능은 동사나 형용사나 또 다른 부사를 수식하는 품사임에도 불구하고 “감사”란 명사앞에 이를 두고 사용하려 함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우리말 오용이 아닐 수 없다.
정도에 지나치거나 기대 이상이란 뜻 ‘너무’가 이를 힘주어 말하거나 강조하는 의미로 ‘너무나’가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느새 그 용도가 아무데고 마구잡이로 쓰이고 있으며 그나마 이젠 본 뜻과 관계없이 한계의 담을 넘은 지 오래다.
걷잡을 수 없이 특히 직접적 순간적으로 청취대상으로 누출돼 있는 방송매체의 출연자들이나 최근 어설피 진행 장면이 자주 눈에 띄는 토크쇼란 이름의 프로그램들을 유심히 보면 가관이다. ‘너무’ 또는 ‘너무나’가 ‘정도를 지나치다’는 의미를 넘어 ‘매우, 아주, 상당히, 참으로, 정말로, 겁나게, 지나치게’와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특히 청소년층이나 누리꾼들의 언어로는 이미 도를 넘은 지 오래다.
필자는 자주 ‘너무나’를 남용하는 누리꾼들에게 꼬리글이나 댓글 같은 ‘리플’로 농담삼아 ‘아주나 매우나 많이’ 사랑한게 아니고 ‘너무나 사랑했다면 전혀 사랑하지 않았단 말’이며 ‘너무나 행복하다면 도대체 행복의 도를 넘어 불행했단 말이냐’며 비아냥댄다. 필자의 시각에선 너무나 큰 사건 사고다.
방송국 스타 군단들이 어불성설 “너무나 감사드리다”
또 ‘집이 아주 크거나 엄청나게 클’경우를 일컬어 ‘너무나 큰 집’이라 한다면 ‘신발이 너무 커 신을 수가 없을 경우와 어떻게 다르냐’고 묻기도 한다. 기준이나 정도가 지나치다는 경우에 사용되던 부정적 뉘앙스의 ‘너무나’가 요즘은 최고나 최상의 기대 이상이란 뜻으로 쓰일 바에야 그 용도가 같아야 하지 않을까?
‘너무나 예쁜 아가씨와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건’ 좋은 의미고 ‘너무나 작은 집이나 너무나 작은 신발은 살기도 힘들고 신을 수도 없으니’ 부정적인 의미라면 ‘너무나’가 갖는 뜻은 통일돼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여기에서 자동사나 타동사를 가리거나 직접 목적어나 간접목적어를 논한다는 것은 마이동풍격으로 언어나 문법을 유희하는 사치이리라.
3. 높임의 대상을 모르는 엉뚱한 높임말이나 엉터리 존대어
앞서 맞춤법 얘기 때도 언급했듯이 유식한 식자들의 지식자랑이나 전문 석학들의 경연장 같은 라디오나 TV 토론 및 좌담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필자는 의식적으로 누군가가 “저희 나라”란 얘기를 쓰면 어쩌나 하고 불안 초조해 한다.
지난 구랍 어느날 밤도 대학교수 중심의 심야 대담프로에서 곧잘 ‘저희 나라, 저희나라’를 연발해서 필자 특유의 안타까움에 마음 상했던 기억이 한두번이 아니다.
상대방이나 윗 사람에게 겸양스럽게 자기를 낮춰 말하는 경우 ‘나’대신에 ‘저’를 쓰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끼리 벌이는 대담프로에서 ‘우리나라’ 대신 ‘저희나라’라고 칭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국인을 외국인으로 착각한 탓?
형제 끼리 대화에선 ‘저희 아버지’라 하지 않듯이 우리끼리는 ‘우리나라’라야 바른 지칭이 된다. 우리 학자나 지도층들 일부가 지금도 흔하게 ‘저희나라’ 운운함은 ‘나’를 ‘저’로 자기낮춤하는 표현을 잘 못 이해하고 이를 겸양어법으로 착각하는 넌센스이리라.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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