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성난 커지자 캠코펀드 재가동…공급조절 특단 필요하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집행을 미뤄왔던 선박펀드를 다시 가동키로 한 것에서 최근 해운업계에 닥친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 캠코는 선박펀드 자금으로 배정돼 있던 5000억원을 상호저축은행 부실채권 매입 자금으로 용도 변경할 계획이었다. 지난해 해운업이 호황이었던 만큼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최근 선사 적자가 확대되고 법정관리 선사들이 줄줄이 출현하자 해운업계 지원에 다시 뛰어들었다. 캠코는 지난 4일 해운선사에 공문을 띄워 선박펀드 재가동을 알렸다.
대형선 초과공급이 ‘화’ 불러
건화물선 시장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지루한 침체를 이어가고 있다. 운임은 바닥권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는 반면 유가는 고공행진을 계속해 선사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바닥운임과 고유가의 이중고가 선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셈이다. 올해 들어 법정관리에 들어간 선사 4곳 가운데 3곳이 벌크선사라는 점에서 벌크선 시장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건화물선운임지수(BDI)는 지난달 말 1200선으로 떨어진 뒤 횡보를 거듭하고 있다. 지난달 초만 하더라도 1500선 돌파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으나 그것도 잠시 하향곡선으로 선회했다. 선사들은 손익분기점을 BDI 2500포인트대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올해 들어 BDI는 2000은커녕 1500선도 제대로 넘어보질 못하고 있다. 최근 2000포인트대를 넘어섰던 케이프사이즈선 운임지수(BCI)는 1700선까지 하락했으며 6월 중순 2000선을 넘봤던 파나막스선 운임지수(BPI)는 1400대로 떨어졌다.
벌크선 시장 침체는 대형선 시장의 공급과잉에서 비롯됐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해부터 14만~17만t급 케이프사이즈선박 용선료는 그보다 더 작은 규모인 파나막스 또는 수프라막스 선박보다 낮은 수준을 형성하고 있다. 대형선 시장의 공급과잉으로 상식을 깨는 운임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9일 현재 케이프사이즈선 일일 평균 용선료(TCE)는 9915달러인 반면 7만t급 안팎인 파나막스선과 5만t급 안팎인 수프라막스선은 각각 1만1772달러 1만3012달러를 기록, 선박의 몸집 차이를 무색케 했다. 특히 아시아-유럽간 케이프사이즈 용선료는 마이너스운임 폭이 커지면서 심각한 수급불균형을 짐작케 한다. 이 노선 용선료는 지난 1월13일 -223달러를 기록, 처음으로 마이너스대로 떨어졌으며 이달 8일 현재 -896달러까지 내려간 상태다.
케이프사이즈 선박은 철광석 석탄 등의 원거리 운송에 특화돼 있는데다 이들 대형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항만이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소형선들에 비해 운항 유연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활용도도 낮을 수밖에 없어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선 오히려 운임하락의 주범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김우호 해운시장분석센터장은 말했다.
특히 올해 들어 케이프사이즈 신조선이 대거 인도되면서 시황 악화를 부추겼다. 클락슨에 따르면 6월까지 케이프사이즈 선박 2150만t(재화중량톤)이 시장에 새롭게 쏟아졌다. 1년 전의 1630만t에 비해 32% 급증한 규모다. 같은 기간 인도된 파나막스선 990만t에 비해선 2배 이상 많다. 이밖에 핸디막스선은 860만t 핸디사이즈선박은 380만t이 상반기에 신조 인도됐다.
이런 가운데 브라질 발레가 40만t급 철광석 운반선을 시장에 내놓은 것도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를 가중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세계 최대 철광석 생산회사가 세계 최대 철광석 운반선 운영에 나서는 것이다. 발레는 현재 40만t급 선박 19척을 건조 중이며 앞으로 장기용선 방식으로 16척을 더 건조해 건화물 시장에 투입할 계획이다. 가뜩이나 공급과잉이 화두인 벌크선 시장에 악재가 아닐 수 없다.
PSC 강화로 노후선 해체 유인해야
공급과잉 해소 대안으로 한 선사 관계자는 항만국통제(PSC) 강화를 제시했다. 이 관계자는 “국제적으로 항만당국이 선박 검사나 PSC 규제를 철저히 해서 노후선 스크랩(해체)이 빨라지도록 해야 한다”며 “선사들에겐 불리할 수 있지만 해체량을 확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 해체된 벌크선은 총 150척 1147만t으로 1년 전 187만t에 비해 6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2분기엔 87척 727만DWT로, 1분기에 견줘 38% 증가했다.
수요는 공급 증가율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인 모습이다. 상반기 중국 철광석 수입량은 3억3436만t을 기록했다. 지난해 3억941만t에 비해 8.1% 증가했다. 특히 1월 수입량은 6897만t으로, 지난해 동기 4662만t에 비해 47.9% 증가하며 사상최대치를 새로 썼다. 올해 들어 중국 철광석 수입량은 2월을 제외하고 모두 월간 5천만t을 넘어섰다. 하지만 향후 전망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지난달 기준 중국의 주요 항만 철광석 재고량이 8990만t으로 12주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기 때문이다. 철광석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부정적이다. 스틸비즈니스브리핑에 따르면 철광석 가격은 현재 t당 175달러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HSBC는 올해 평균 철광석 가격을 t당 160달러로 전망했다. 지난해의 122달러에 견줘 31%나 급등하는 것이다.
중국의 석탄 수요는 하락추세다. 중국석탄공업협회에 따르면 상반기 중국 석탄수입량은 7049만t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1.8% 감소했다. 수출량 역시 875만t으로 13.7% 줄어들었다. 게다가 항만과 발전소에서 보유하고 있는 석탄 재고량도 늘어나 앞으로도 수입량은 약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주요 항만내 석탄재고량은 2395만t, 발전소 재고량은 6536만t으로 1년 전보다 각각 24.5% 13%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클락슨도 올해 벌크선 시장 물동량 전망치를 하향 수정했다. 클락슨은 지난 3월 올해 벌크선 물동량 전망치를 35억t으로 발표했다가 최근 34억3천만t으로 내려 잡았다. 증가율도 5.9%에서 3.9%로 2%포인트 낮췄다.
여기에 더해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 소식이 전 세계로 타전되면서 해운업계엔 또다시 암운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중국과 함께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인 미국의 위기는 곧 해운시장에선 수요 위축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대형선사 한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공급에 의한 불황이었다면 앞으로는 수요측면에 의한 불황이 올 것으로 보인다”며 “업체 수가 난립해 있는 상황에서 전체적으로 파이가 커지지 않는다면 시황 반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벌크선 시장에 호재로 작용하는 항만체선은 이렇다할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7월 말 현재 호주 브라질 인도 중국 항만내 벌크선 체선은 5900만t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해에 비해 10% 이상 증가한 수치로 전체 벌크선대의 11%를 차지한다. 케이프사이즈 선대는 3640만t을 기록했다. 선사 한 관계자는 “체선이 심화될 경우 선박수요를 확대하는 효과를 불러와 시장에 긍정적일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선복과잉이 워낙 심해 체선이 얼마나 시장 부양효과를 낼진 미지수”라고 말했다.
연료비 높아도 BAF 징수는 ‘그림의 떡’
국제유가는 여전히 고공비행하며 선사들을 옥죄고 있다. 선박 연료로 쓰이는 벙커유 가격(IFO 380cst)은 9일 현재 싱가포르항 기준 630달러대를 기록했다. 이달 초 680달러대까지 치솟았다가 한풀 꺾였다. 하지만 여전히 지난해 평균 가격 465달러에 비해 35%가량 높다.
그 결과 선사들의 비용구조도 악화되고 있다. STX팬오션의 1분기 연료비 지출액은 지난해 2억3782만달러에서 올해 3억4646만달러로 45.7% 급증했다. 올해 법정관리에 들어간 대한해운은 지난 1분기 1122억원을 연료비로 썼다. 1년 전 862억에서 30% 늘어난 금액이다. 매출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STX팬오션은 지난해 23.3%에서 올해 31.7%로, 대한해운은 14.5%에서 23%로 크게 확대됐다.
문제는 벌크선사들은 정기선사와 다르게 유가할증료(BAF)를 거의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용선이나 장기운송계약(COA)과 같이 화주와 장기적으로 수송을 진행할 경우 계약서상에 연료비 상승분을 보전받는다는 내용을 포함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단기용선 계약의 경우 BAF 부과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금융기관의 외면으로 벌크선사들의 돈줄이 마르고 있어 줄도산 공포가 현실화되고 있다. 해운업은 자본집약적 산업 특성상 용선료 연료비 인건비 등 많은 운영자금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최악의 시장상황에서 시중은행들까지 신용 지원에 난색을 표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최근 금융권에선 건설업과 해운업을 여신 공여 기피 산업으로 정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열린 전국은행연합회와 선사들이 만난 자리에서도 은행권은 이 같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선박금융은 아웃’이라고 공언한 상황에서 은행권을 기대하지 말아 달라”라고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중견선사 관계자는 “간담회에서 선사 지원방향을 새롭게 설계한다던지 신디케이트 구성이라던지 구체적인 대안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해운업엔 지원해줄 수 없다는 입장만 확인했다”고 낙담했다.
자산매각으로 자금 조달 나선다
상황이 이러하자 선사들은 자금 조달을 위해 자산매각에 눈을 돌리고 있다. STX팬오션은 신조선 도입에 맞춰 노령화된 벌크선 4척을 매각했다. 케이프사이즈선박 1척과 핸디사이즈 3척 등으로 선가는 총 5550만달러에 이른다. STX팬오션은 선박 매각에 힘입어 2분기에 시장의 예상을 깨고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대한해운도 재정난 해소를 위해 자산매각에 나서고 있다. 대한해운은 최근 현대상선에 아프라막스급 유조선 2척을 총 8700만달러에 매각했으며 18만t급 케이프사이즈 벌크선 <베고니아>호도 인수 대상을 물색 중이다. 대한해운은 현재 시세를 고려해 3900만달러 수준 정도에 해당선박을 매각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해운은 이밖에 본사 사옥을 447억원에 처분하는 한편 자회사인 광양선박도 281억5200만원에 매각했다.
캠코의 선박매입에도 선사들은 기대를 걸고 있다. 캠코는 18일까지 매각신청서를 선사들로부터 접수받을 예정이다. 척당 200억∼400억원으로 선가를 산정할 경우 약 13∼15척을 매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계상황에 처한 20여개 중소선사들이 캠코에 매각 신청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경희 차장 khlee@ks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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