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5위의 컨테이너 전용항만이자 세계적인 무역항인 부산항은 지난 2006년 부산신항의 개장 이후로 기존의 북항과 신항으로 나뉘어져 동북아 물류거점항으로 매년 급격한 성장세를 이루며 활발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로 개항 5주년을 맞게 되는 부산신항의 부두건설 및 항만 환경, 물류 창고 현황, 항만 부대시설 현황 등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역사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알지 못했던 내용을 자세히 풀어보고자 한다.
▲ 부산항의 시작
대한민국 최대의 항구도시이자 관문인 부산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항구로 항만법상 제1종 항이며 지난 1876년(고종 13년) 2월27일에 병자수호조약의 체결로 근대항으로서는 제일 먼저 개항해 1세기에 걸친 축항과 항만시설의 정비로 우리나라 최대의 항만이자 수출입 및 교역의 관문이며 항내수면적(港內水面積) 1610만㎡의 대형 항구로 성장했다.
병자수호조약은 조선 고종 13년에 일본과 맺은 수호조약으로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하며, 외국과 맺은 최초의 수호조약으로서 모두 전문 12개조로 돼 있다. 그러나 부산·인천·원산 등 3항을 개항하도록 규정하는 등 우리나라만의 의무를 강요한 불평등조약이기도 하다. 병자수호조약의 전문 12관의 주요 사항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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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 매립 전 부산항의 모습 |
- 1876년 2월부터 20개월 이내에 부산항 이외에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등 5개 도 중 연안에 2개항을 개항하고 일본상인에게 거주, 무역 등 편의 제공
- 일본에게 조선의 연해, 도서, 암초 등 측량권, 조선의 해도 작성권 행사
- 일본은 조선이 지정한 항구에 영사를 주재시키고 조선 내의 일본인 범죄에 대한 영사재판권 행사
위와 같이 조약의 내용은 당시 조선에게 불리한 사항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우리 부산항이 개항하게 된 것이다.
1883년 11월 3일, 항 개항과 더불어 가장 먼저 설립된 기관은 지금의 세관격인 해관(海關)이다. 원산·인천과 더불어 설립됐으며, 우리나라에서 수출입물품에 대해 세금을 제도적으로 첫 부과 징수했다. 지금도 1부두 옆에 위치한 부산경남본부세관 뒤뜰에는 지난 1883년에 설치된 설립비가 건재해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개항을 한 1876년에서 1883년까지 7년 동안은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관계로 기계 제조 공정을 거친 저렴한 외국의 상품이 부산항을 통해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이로 말미암아 재래식 소수의 수공업품목을 생산하던 우리나라의 수공업은 급격히 몰락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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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준공한 부산세관 초창기 모습 |
당시에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세관 설치의 중요성과 또 그에 따른 세금 징수가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런 위정자들도 개항장에서 오가는 수출입과 국내산업의 쇠퇴를 직접 보고 겪으며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즉 정확한 세금 부가가 국가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개항초기 관세제도는 1876년부터 1883년까지 입항선박에 대한 항세만 수납했고 수출입화물은 무세로 자유로이 수출입했으며 선박입출항과 화물수출입은 일본영사관에 신고했다.
1882년 5월22년 한미 수호통상 조약 체결로 세칙이 제정됐으며 한미수호조약에 따른 세칙내용은 다음과 같다.
- 1882. 6. 4.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한일 세칙제정에 관한 협상을 요구해 조선 정부에서는 한미 수호조약의 관세율과 동일한 세율을 요구했으나 협의 중에 임오군란 발생으로 협의 중단.
- 1882. 7. 25.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조선정부의 외교 및 재정고문으로 있던 독일인 Paul Geoge Von Moellendorff에 의해 한일통상장정(세칙)과 해관세목(상품별 관세율)이 불리하게 제정됨.
- 1887. 2. 1 당시 부산해관장 서리 T.Piry는 부산항의 항계를 설정해 부산주재 일본영사에게 의견을 조회하는 등 해관업무를 실시
- 1887. 2. 23. 인천항 항계규칙 제정 실시 (명칭: 仁川港口 停泊船隻暫行章程)
- 1887. 6. 1. 부산항, 원산항 항계규칙 제정 실시
- 1887. 9. 1. 해관 가(假) 규칙 제정 (명칭: 暫行 稅務章程- 2장 13개조)
- 1887. 10. 31. 해관창고 관리규칙 제정
- 1887. 10. 31. 해관창고 보관료 규칙 제정
- 1901. 4. 폭발물 창고 규칙 제정
해관은 처음 개항장인 부산과 뒤에 개항한 원산과 인천에 각각 설치됐고 중앙에 총세무사청(總稅務司廳)이 설치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다루는 해관사무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에 반대하는 일본의 개입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 이홍장이 추천하는 서양인을 고용해 해관사무를 보게 했다. 당시 총세무사에는 독일인인 묀렌도로프가 임명됐다.
그리고 초대 부산 해관장에는 로버트 하트(Robert Hart)라는 영국사람이 임명됐다. 이어 프랑스인 비리, 영국인 한드, 프랑스인 라보오라, 이탈리아인 패코리니 등이 임명됐다. 을사조약 후인 1906년 야마오가(山岡義五郞)라는 일본인이 해관장으로 임명된 후 일본인이 계속 임명됐다가 1908년부터 총세무사를 없애고 관세국(關稅局)을 둬 조선정부의 탁지부(度支部)에 소속시켰다. 1910년 일제강점 후는 조선총독부 세관으로 바뀌었다. 그 후 1948년 11월 정부수립과 동시에 재무부 세관국 소속으로 변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산세관의 역사는 바로 부산항 개항의 역사와 같다. 본격적인 세관업무를 관장함에 따라 국가의 세수가 증가했고 또 부산항의 본격적인 성장을 이뤘다. 부산항의 성장배경에는 부산항만이 가진 많은 장점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먼저 지정학적으로 태평양 동남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를 연결하는 주요 항로상에 위치해 있어 세계 곳곳으로 진출이 유리하다.
부산과 세계를 이어주는 각국 주요항만과의 활발한 물동량 전개로 수많은 선박이 자유로이 왕래해 국가간 교역에 신속, 정확한 물류 서비스가 가능하다.
또 항구의 입출항이 자유로워 신속함이 생명인 해운회사에게 많은 이점을 안겨주고 있다. 즉 부산 북항 방파제를 통과하면 바로 화물을 하역 및 적재할 수 있는 부두에 바로 접안이 가능해 화물 운송에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길고 굽은 수로를 통과하거나 복잡한 해안선을 경유할 필요없이 바로 대한해협을 통과하면 입항이 가능해 화물 운송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운항 선사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타 지역에 위치한 항만에 비해 안정된 운항 수심을 유지해 갈수록 대형화돼 가는 선박들의 안전한 항해가 보장된다. 불과 20여년 사이에 조선 산업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당시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1만TEU 이상의 선박이 출현해 단 한번에 엄청난 양의 화물을 운송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로 인해 초대형 선박을 안전하게 출입항 할 수 있게 하는 항로의 수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같은 여러 가지 장점은 부산항을 현재 세계 5위의 자리에 올려놓는 토대가 됐다.
▲ 부산항의 성장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항된 부산항은 1906년 부산항의 축항 공사가 시작돼 1910년 최초로 제1부두가 축조된 후 1945년까지 제 2·3·4부두 및 물양장 방파제가 축조됐다.
1974년부터 착수한 세계은행(IBRD) 차관에 의한 부산항 개발 1단계 공사로 컨테이너와 양곡 전용부두인 제 5부두, 고철·광석·석탄을 취급하는 제 7부두, 특수화물만을 취급하는 제 8부두, 국제여객·연안여객부두, 기존 부두인 제 1·2부두에 대한 대대적인 개축·정비 등으로 선박 접안능력을 높여 최대 5만t급 선박 3척을 비롯한 52척의 대·소형 선박이 동시 접안할 수 있고, 하역능력은 연간 700만t에서 1500만t으로 늘어나 국제항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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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사업 전 북항 사진. 좌측 하단부터 1, 중앙, 3, 4부두가 보인다 |
1978년부터 제 2단계 개발공사를 시작,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제 6부두, 기존부두인 제 3·4부두, 중앙부두 제 5물양장 개축공사를 했다. 2단계 사업의 완료로 전체 하역능력은 연간 1500만t에서 1860만t으로, 컨테이너 처리능력도 연간 20만TEU에서 40만TEU로 증가했다.
그러나 부산항은 이때부터 입항하는 외항선이 연간 7,895척으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선박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수출화물 처리량도 전국 항만 물동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점차 기능이 마비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또 북외항(北外港) 입구에 컨테이너 부두와 방파제를 축조하고 보조항으로서 감천항을 개발해 정부예산과 민자(民資) 유치로 양곡·고철 등을 취급하는 전용부두와 어선 및 조선기지를 조성했다. 다대포항(多大浦港)을 개발해 북항에 산재한 합판공장과 저목장을 통합 수용할 수 있는 합판공업지원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국제 및 연안 여객부두가 이 당시 준공돼 우리나라 최초로 차량 통관 시설을 갖춘 국제적 여객부두로 모습을 보이게 됐다.
또 부산항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아서 안되는 게 바로 자성대 부두다. 현재의 정확한 명칭은 허치슨부산컨테이너터미널(HBCT)이다. 지난 1974년 부산항 종합개발사업으로 컨테이너 부두건설에 착수해 4년의 공사 끝에 1978년 우리나라 최초로 5만t급 컨테이너 2개 선석인 제 5부두가 개장됐으며, 1983년 부산항 제 2단계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제 6부두를 증설했다. 부두 개장 13년 만인 1991년에는 1천만TEU를 달성해 부산항을 세계적인 컨테이너 전용항만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자성대부두의 명칭은 부두가 위치한 지역의 지명을 본 따서 붙여진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맞춰 급격히 늘어난 물동량을 처리하기 위한 부두 확장으로 1985년 신선대 부두, 1991년 감만부두, 1992년 우암부두가 차례로 건설돼 현재의 세계 5위의 컨테이너 전용항만으로서의 명성을 드높이게 됐다. 그리고 1995년 5월 자성대부두가 민영화 돼 현대컨테이너터미널(이후 한국허치슨터미널로 매각됨)로 재개장 하게 됐다.
이와 같이 변화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핵심 항만 역할을 오랫동안 지속해온 부산항은 현재 동북아 물류기지로서의 지정학적 이점과 우리나라 동남부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으로 국내 수출입 중심의 경제구조에 걸맞는 우리나라 제1의 국제항으로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현재는 국제항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내며 환태평양 중심항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부산항은 여러 개의 다목적 부두로 이뤄진 종합항만으로 컨테이너 잡화 양곡, 광석 등 여러 가지 화물을 전세계에 운송하는데 최적의 항만이며 우리나라 총 해상수출화물의 40%, 컨테이너 화물의 80%, 전국 수산물생산량의 42%를 처리해 우리나라 제1의 항만으로써 그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현재 부산항의 컨테이너 화물 처리량은 지난 1993년 대비 4.6배 이상 성장했으며 진행중인 부산 신항의 확장에 발 맞춰 앞으로도 지속적인 고성장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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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계도 |
또한 부두 현황 외 한가지 더 소개할 것이 바로 부산항계다. 항계란, 항만의 경계가 되며 개항질서법의 적용대상 범위를 말한다. 부산항계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명동 신명 남단을 기점으로 해 우도 남동단, 연도 서남단, 가덕도 남측 끝단(위도 34도 59분, 경도 128도 49.5분)지점, 생도남단, 오륙도 남단, 위도 35도 08분 33.20초, 경도 129도 08분 51.60초 지점, 광안대로 남측 축도부 남단(위도 35도 08분 08.90초, 경도 129도 06분 44.00초) 지점을 연결한 해안의 해면을 일컫는다. <계속>
<부산=김진우 차장 eaglekjw@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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