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6-02 17:00
<창간35주년 특집> 한국포워더 30년을 조명한다(上)
●●●우리나라 최초의 복합운송(포워딩) 형태의 운송방식은 6·25로 전 국토가 폐허가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인 1958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한국미곡창고(現 대한통운)는 주 교역상대국인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수출화물 샘플을 동일한 목적지별로 모아서 박스나 용기에 담아 수송했고 수입화물의 경우 부산항에서 국내 각 지역 수하주별로 재분류해 일관운송했다. 이때에도 일관선하증권(Through B/L)이 쓰였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선 동방운수창고(現 동방)나 세방등도 하역, 창고, 육송을 주업무로 하면서 필요에 따라 포워더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때는 외환사정이 좋지 않아 하주로부터 운임을 달러로 받지 못했다. 때문에 이들 업체는 운임을 원화로 일단 받아놓고 상대국 파트너와 취급경비를 상쇄하는 식으로 운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포워더 대리점역할로 포워딩 시작
우리나라에 포워딩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1970년대부터다. 한국의 수출입 물동량이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크게 늘어나면서 이에 주목한 스위스, 독일등 외국계 글로벌 포워더들이 한국에 상륙해 대리점 형태로 서비스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엔 지금과 같은 전문 복합운송업체가 전무했기 때문에 이들의 대리점 업무는 주로 선박대리점업체가 맡았다.
이때의 국내 포워더의 역할은 매우 단순했다. 외국 바이어가 한국상품을 수입하면서 한국 포워더를 신용장(L/C)에 지정(Nomination)하면 해당 한국포워더는 국내 여러하주로부터 화물을 인수해 외국 바이어에게 선적 및 수송해주는 ‘바이어 콘솔’형태였다. 주요 수입원은 운임중 외국 파트너에 송금한 후 얼마간 받는 수수료였다.
포워더의 개념이 외국 바이어의 노미네이션 화물에서부터 도입되자 국내 하주들의 반발이 심했다. 자신들의 선사 선택권이 좁아질뿐 아니라 생소한 운송서비스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또 선박대리점이 포워딩 서비스를 하면서 문제점도 불거졌다. 외국 선주의 업무를 대행해 화물집화를 하는 선박대리점으로선 전체 선사들을 대상으로 하주의 대변인 역할을 해야하는 포워더의 업무가 상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973년 이후 선박대리점에서 맡았던 포워딩 에이전트 업무는 하나둘씩 개별 독립법인으로 분리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한국 복합운송업은 서서히 발전의 발판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1973년 6월28일 아세아익스프레스가 스위스계 글로벌 포워더인 퀴네앤드나겔(Kuehne+Nagel)의 파트너로서 포워딩업무를 시작해 국내 최초의 순수 포워딩업체로 이름을 올렸다. 같은해 11월5일엔 해성운송이 스위스 재키 매더(Jacky Maeder)와 파트너 계약을 맺고 포워딩 업무를 시작했다.
이어 1974년엔 외국기업과의 파트너계약이 봇물을 이뤘다. 그해 ▲1월31일 그랜드해운이 독일 한사트란스포트(Hansa Transport)와 ▲5월8일 일양해운이 독일 헤르만 루드비히(Herman Ludwig)와 ▲5월9일 오리엔탈엔터프라이즈가 독일 유러피언 트랜스포트 시스템과 ▲6월14일 천우통운이 스위스 기업 맷트랜스포트(Mat Transport)와 각각 파트너 계약을 맺고 포워딩 업무에 들어갔다.
이후 복운업이 장래 유망업종으로 주목받으면서 3~4년 사이에 포워더로 이름을 내건 회사가 잇따라 생겨났다.
항공운송주선업 첫 8개사 출범
한편 초기 항공운송주선업은 정부가 시장진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보호산업으로 육성됐다. 한개 업체가 늘어나는데도 엄청난 로비와 프리미엄이 오갔을 뿐 아니라 심지어 청와대나 장관출신이 이 업종에 들어오기도 했다 한다.
1969년 5월19일 항공법 개정과 함께 항공운송대리점업 및 항공운송주선업이 법제화되고 당시 이 사업을 하고 있던 8개사가 첫 면허를 땄다. 첫 면허업체는 항공운송주선업 1호업체로 알려진 한국항공화물(KAS)을 비롯해, 서울항공화물, 에버리트기선, 제일항역, 해외항공화물등이었다.
이들 8개사는 1969년 11월 항공운송주선업 단체인 ‘대한항공화물운송주선업협회’를 창립했고, 협회는 1년 후인 1970년 11월23일 교통부로부터 사단법인으로 공식인가를 받았다. 이후 1972~75년에 5개사가 추가로 들어서면서 항공주선업체는 13개사 체제로 재편되기에 이른다. 이때 면허를 얻은 업체는 게이트웨이, 동아항공화물, 아세아항공, 고려항공화물, 점보항공화물등이다.
이렇듯 13개사 체제가 확립됐지만 이들간 희비는 엇갈렸다. 바로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대리점 자격 때문이었다. IATA운송회의결의(IATA Resolution)에 따라 자격이 주어지는 IATA대리점은 IATA본부의 공식인정을 받아야 하고, 인정이 되면 IATA 가맹 전 항공사와 대리점 계약을 체결할 수가 있다.
교통부로부터 항공운송대리점 면허를 취득했다고 해도 IATA대리점 자격을 얻지 못하면 항공사들이 항공운송장(AWB)를 발행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체적인 운송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주수입원이라 할 수 있는 수수료(집화보상금) 5%를 항공사로부터 지급받지 못해 안정적인 경영을 해나갈 수가 없었다. IATA대리점과 비IATA대리점간 영업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셈.
비IATA대리점이 IATA대리점이 되기 위해서는 IATA 항공사와 일정기간 거래 실적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단번에 자격을 얻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초창기 항공포워딩이었던 반도항공화물이나 대영항공이 무너지게 된 이유도 결국 IATA대리점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이같이 항공포워더들은 항공사의 화물대리점 역할이 컸기 때문에 초기엔 이들을 부르는 명칭도 포워더가 아닌 항공사대리점, 혹은 캐리어 에이전트(Carrier Agent)였다.
당시 항공화물은 크게 항공화물과 긴급항공화물로 나뉘었다.
일반 항공화물의 경우 무역용 샘플들이 많았다. 70년대 들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의류제품 등 비교적 경공업 제품이 주문자생산(OEM) 방식에 의해 한국에서 일본으로 많이 수출됐다. 이중 항공운임 부담이 없는 무역용 샘플들이 항공운송을 많이 이용했다. 선적전에 미리 항공편으로 보내는 선발견본(Advance Sample)이나 승인견본(approval sample)등이 당시 대표적인 항공화물 품목이었다. 70년대 중반엔 나이키가 국내에 상륙하고, 반도상사(엘지상사)등이 가죽잠바를 만들어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에 대한 견본운송도 항공포워더에겐 중요한 수입원중 하나가 됐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가발 수출이 급격히 늘면서 항공포워더의 일손을 바쁘게 했다.
한편 긴급화물로는 납기지연된 화물을 들 수 있다. 특히 미국행 수출품중 납기지연된 화물들이 항공화물을 많이 이용했다. 미국의 무역법상 정해진 기간내에 물품이 안들어오면 수입업자가 제재를 받았기 때문. 때문에 납기가 늦어진 화물들은 ‘울며겨자먹기’로 항공운송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하주들은 항공포워더들을 ‘장례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부가가치가 낮은 의류제품들을 항공으로 수출하고 나면 엄청난 항공운임에 도산으로까지 내몰렸기 때문이다.
해상운송주선업 면허제 도입
해상포워더의 경우 1970년대 중반 포워딩이란 업무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할 즈음 제도적인 문제에 봉착했다. 국제간 업무를 벌이는 포워딩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어 외환거래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당장 외국파트너로의 송금문제였다. 당시 외국환관리규정엔 거주자계정이 없으면 외환취급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이들은 운임은 물론 파트너에게 보내는 수수료조차도 송금을 못하는 실정이었다. 포워더가 발행한 B/L에 대한 외국환은행의 대금결재도 문제였다. 정부면허업체인 선박회사와 선박대리점이 포워딩을 겸업할 땐 이미 거주자계정이 설정돼 있어서 별문제가 없었으나 순수 전문 포워더들은 법적 근거가 없어 외환거래가 불가능했다.
날이 갈수록 외국파트너로 보낼 송금액이 불어나고 이에 따른 문제가 커지자 해결책으로 포워더들은 복합운송업종의 면허제 도입을 정부에 요구했다. 1976년 2월 천우통운, 아세아익스프레스, 해성운송등 포워더 사장단들은 당시 교통부 해운국장과 면담을 갖고 근대 운송시스템에서 포워더가 갖는 역할과 중요성을 설명하고 포워딩업의 면허제 도입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교통부 주무부서인 해운국 외항과에서 처음으로 프레이트포워더에 대한 용어와 업무를 인식하게 됐고 면허제 시행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진국의 경우도 미국을 제외하고는 포워더의 면허제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법적근거를 도입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였다.
결국 정부는 법적근거를 해상운송사업법중 외항부대사업면허조항에 두고 해상운송주선업을 신설하게 됐다. 이와 함께 정부는 교통부의 한 부서에서 이뤄지던 해운항만에 대한 관리를 독립시키기로 하고 교통부 산하의 해운항만청(해항청)을 발족했다.
해운항만청은 발족 이후 26개사에 첫 면허를 발급함으로써 1976년 10월30일 해상운송주선업체가 국내에 공식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6개 업체는 3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수가 도산하고 삼영익스프레스, 세방, 오리엔트쉬핑, 제일항역, 일양해운, 천우통운등 11곳만이 현재까지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최초 면허제 도입당시 면허 기준으로는 ▲자본금 3천만원이상 ▲일관선하증권(Through B/L) 발행 ▲외국포워더와 대리점 계약 ▲텔렉스 보유 또는 공동사용 ▲컨테이너장치장(CY) 및 컨테이너조작장(CFS) 확보등 지금으로 봤을 땐 다소 낯선 내용도 담겨 있었다. 이중 텔렉스의 경우 당시 외국과의 주요 통신수단이 국제전보에서 텔렉스로 넘어오면서, 포워더도 국제사업인 만큼 텔렉스 확보를 강제화 한것이다.
이후 77년 8곳, 78년 16곳, 79년 3곳등 해항청은 1979년까지 3차에 걸쳐 총 50개사에 해상운송주선업 면허를 발급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해항청은 기존업체를 보호한다는 취지로 ‘신규면허불허지침’을 내리고 1983년 상반기까지 면허발급을 중단했다.
그러나 정책목표와는 달리 면허를 확보하기 위한 업체들의 갈증은 커져 면허증 한장에 막대한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는 등 부작용이 일기도 했다.
80년대 수출품 늘면서 복운업 발전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와 대만, 홍콩등 당시 4마리의 용으로 불리던 아시아 신흥공업국에서 수출품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전통적인 의류제품이 고급화됐고 기계제품 수출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렇듯 수출호조로 운송수요가 증가하자 정부는 운송공급을 늘리기 위해 면허제를 포기하고 등록제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해항청은 1983년 말 해상운송사업법을 해운업법으로 명칭을 바꾸고 내용도 전면 개정하면서 면허업종이던 해상운송주선업을 등록업종으로 완화했다. 정부가 면허 업종이라는 높은 울타리로 기존업체를 보호해주던 정책에서 누구나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경쟁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등록제는 등록기준에 적합하면 아무런 제한없이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등록제 근본 취지와 달리 정부가 업체수 증가에 관한 속도관리를 했다. 완전등록제라기보다는 제한적 등록제인 것. 정부는 84년 10월10일 해운업법시행규칙상의 등록기준에 해무사 확보의무와 임원중 전문경력소지자를 두도록 해 비전문가의 무분별한 업계유입을 막고자 하는 장치를 마련하기도 했다. 등록제로 바뀐 뒤 1984년과 85년에 걸쳐 25개사가 신규 등록했다. 이에 따라 업계에선 지나친 업체수 난립을 우려해 협회를 중심으로 업체등록을 중단해줄 것을 해항청장에 요청, 해항청은 85년 5월부터 87년 6월말까지 업체수를 71개사로 동결하고 신규등록을 받지 않았다.
한편 80년대엔 포워더 발행 B/L이 은행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NVOCC(무선박운송인)개념이 미국에서 제도적으로 허용되는 등 복운업 발전의 토대가 마련됐다.
‘83년 4차개정 ICC(국제상공회의소) 신용장통일규칙’이 84년 10월1일부로 발효되면서 국제운송주선인협회연맹(FIATA)에서 정한 B/L이 은행에서 매입할 수 있게 돼 기존 선박회사 B/L만이 누려오던 금융거래상의 잇점을 포워더 B/L도 동등하게 받을 수 있게 됐다.
또 미국이 ‘1984년 해운법(Shipping Act)’에서 프레이트 포워더의 복합운송인화를 실체화한 NVOCC(무선박운송인) 개념을 제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해상운송주선업의 복합운송체제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80년대 중반 들어선 칼라티비를 비롯해 전자제품이 본격적으로 생산되면서 항공화물운송도 샘플운송이 아닌 일반화물운송으로 확대돼 나갔다. 또 통신장비도 기존 텔렉스에서 팩스가 도입돼 빠른 속도로 상용화되기에 이르렀다.
해상, 항공운송 수요가 늘어나고 이에 따른 물량처리도 늘어나면서 복운업계는 해상과 항공을 연계하고 통관까지 아우르는 일관운송체제에 갈증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곳은 해상포워딩업계.
현재는 상용화된 해상항공연계운송인 씨앤에어(Sea&Air)는 80년대 중반에 처음 우리나라 포워딩 업계에 신 운송루트로 검토됐다. 씨앤에어는 해상운송하려던 유럽행 화물이 납기가 늦어질 경우 많이 이용됐다. 북미를 경유하는 루트와 구소련이나 동남아를 경유하는 루트가 소개됐고 이중 북미루트가 일반적이었다. 북미루트의 경우 ▲캐나다 뱅쿠버로 해상운송해 뱅쿠버에서 토론토로 육송, 여기서 항공운송으로 최종목적지인 유럽으로 가거나 ▲LA나 시애틀까지 해상운송해 철송으로 마이애미까지 가서 항공편을 이용하는 방식이 개발됐다.
구소련 루트는 해상으로 보스토치니로 연결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공으로 모스크바를 경유해 유럽이나 중동으로 운송하는 것이다. 동남아루트는 선박으로 홍콩, 방콕, 싱가폴 등지로 운송한 다음 항공기에 옮겨 실어 유럽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처음 씨앤에어를 시작한 곳은 지금은 TNT프레이트매니지먼트로 이름이 바뀐 성진콩코드로, 이 업체는 1985년께 첫 씨앤에어 서비스를 선보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씨앤에어 운송은 해상과 항공이 서로 개방되지 않아 발전에 그 한계가 있었다.
또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통한 시베리아랜드브릿지(SLB) ▲북미 주요항구로 해상운송한 후 철송으로 북미동안까지 운송, 다시 해상으로 유럽까지 연결하는 아메리카랜드브릿지(ALB), 캐나다랜드브릿지(CLB)도 복합운송루트로 주목받았다. 해상운송인의 복합운송화가 부각되면서 하주들의 이용률도 높아져 80년대초 57%에 불과하던 복합운송업체 이용률은 85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75%로 높아졌다.
이렇듯 복합운송에 대한 추세는 일반화돼 갔으나 해상과 항공운송주선업에 대한 면허가 서로 굳게 닫혀 있어 이에 대한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해상운송주선업협회는 84년 6월 씨앤에어(Sea&Air) 운송이 일반화돼가는 국제추세를 들어 항공화물운송대리점면허를 개방해 줄 것을 교통부에 건의했다. 이어 87년 3월 통관법인허가요건 제도개선을 관철하기 위해 관세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87년 해상·항공 상호개방…복합운송 기틀마련
이같은 대내외적인 변화를 타고 1987년 하반기에 복운업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1987년 7월1일부로 복운업계의 진입장벽이 완전 개방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복운업계의 등록제 도입에 대한 목소리가 높고 86년 발효된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대외개방을 대비해 등록기준만 갖추면 아무런 제한없이 누구나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완전 등록제(신고제)를 시행하기에 이른다.
완전등록제 시행 이후 해상운송주선업체수는 큰 폭으로 늘어 신고제 시행 당시 71개사였던 업체수는 87년말 149개사, 88년 198개사로 뛰더니, 89년 232개사로 3배이상 늘어났다.
철옹성과도 같던 항공운송주선업계도 개방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다. 해상포워딩업계가 개방되던 해 교통부도 해상포워딩업계와 정치권에서의 지속적인 개방 요청을 수용하고 항공법 개정에 나선 것이다. 1987년 12월4일 항공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듬해인 88년 6월부터 시행되기에 이른다. 당시 항공포워딩 개방을 위해 해상운송주선업협회 이사장이던 신학준씨가 교통부 장관과 담판을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개방조치로 87년말 25개사로 묶여 있던 항공운송주선업은 신규업체들의 진입과 함께 본격적인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개방 초기 항공운송업체는 해상운송업계와 신규설립된 회사등 30여개사가 새로 등록, 50여개사로 늘었다. 이 시기에 항공화물운송대리점 면허를 딴 업체로는 삼영익스프레스, 우진글로벌로지스틱스, 세방, 일양익스프레스, 해륙해운항공, 고려해운항공, 동우국제, 천우익스프레스, 아라항역 등이다.
그러나 항공화물업계의 개방은 전면개방은 아니었다. 해상운송주선협회 회원들에 한해서만 우선 개방하기로 하는 한편 등록기준도 김포공항부근 화물창고 50평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조항으로 제도적인 문턱을 어느 정도 살려뒀다. 또 기존 25개사들은 새로 가입한 업체를 ‘신생업체’라 부르고 영업·업무적으로 심한 견제를 해 갈등을 빚기도 했다. 기존업체들은 김포 부근에 ‘주선업공동창고’를 지어 공동사용함으로써 등록기준을 맞추는 한편, 신생업체에겐 이를 개방하지 않았다.
부분적인 개방이었긴 하지만 등록제 전환 이후로 신규 항공포워더들은 꾸준히 늘었다. 교통부가 화물유통촉진법을 제정, 항공운송주선업을 복합운송업으로 이관하던 1991년 12월 현재까지 항공포워더는 79개사로 증가했다.
한편 1989년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서비스산업의 국제 자유화바람이 미국의 거센 개방압력과 함께 구체화되면서 결국 1989년 개정된 해운업법은 외국인의 국내합작투자를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외국인과 내국인의 합작투자 비율을 49:51로 허용함으로써 막강한 자본력과 네트워크를 무기로 하는 글로벌 포워더들의 국내진출을 눈앞에 두게 됐다. 당시까지 합작형태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외국계 물류기업은 미쓰이소코, 프리츠등 2~3곳에 불과했다.
이와 더불어 국제특송업체인 페덱스가 89년 자체항공기를 투입하고 포워더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항공운송업계는 또 한번의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됐다. 특송사의 복합운송업 진출로 항공포워딩업계는 기존의 지역과 지역(Point to Point)간 연결이 아니라 문전연결(Door to Door) 서비스의 도입을 서두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90년대 들어서면서 총액결재조건인 DDP(관세지급인도조건)나 DDU(관세미지급인도조건)에 따른 일관운송서비스가 검토되기 시작했다.
포워더 실적 13년새 16배 늘어
70년대 포워더들이 면허를 취득하고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한 이후 이들의 운송실적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1977년 34개 해상운송주선업체가 취급한 화물은 컨테이너화물 3만4302TEU, 일반화물 19만1901t(운임톤)이었으나 13년이 흐른 89년엔 컨테이너화물 57만6840TEU, 일반화물 228만353t으로 증가했다. 컨테이너화물은 16배, 일반화물은 11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업체수가 7배로 늘어난 것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큰 폭의 성장이다.
77년부터 89년까지 13년간 포워더들이 처리한 화물량은 컨테이너의 경우 총 271만8815TEU로 이중 수출컨테이너화물이 90% 정도인 243만2588TEU, 수입컨테이너화물이 28만6227TEU였다. 일반화물은 총 1003만161t으로 수출이 60%를 넘는 639만3676t, 수입이 363만6425t이다.
우리나라 전체 해상컨테이너화물중 포워더가 처리한 비율의 신장도 괄목할만하다. 77년 우리나라 전체 컨테이너화물 40만7598teu중 3만4302teu를 포워더가 취급해 겨우 8%에 불과했으나 이듬해인 78년엔 전체 50만9147TEU중 포워더 취급량이 5만6692TEU로 11%를 차지했다. 이후 86년엔 전체 127만1171TEU에서 22%인 27만9886TEU, 89년엔 전체 188만4081TEU중 31%에 달하는 57만6840TEU를 우리나라 포워더들이 핸들링했다.
수출컨테이너화물 점유율은 더욱 신장세가 높아, 77년 전체 수출컨테이너화물 23만7310TEU중 포워더가 처리한 물량은 3만3052TEU로 14%에 불과했으나 79년 21%, 86년 32%를 넘어선 후 89년엔 전체 107만6271TEU중 49만2397TEU를 처리해 46%의 점유율을 보였다. 해상수출화물의 절반가량을 국내포워더들이 취급한 것이다.
포워더들의 컨테이너화물 취급량을 지역별로 보면 79년부터 89년까지 11년간 총 취급량은 262만7822TEU로, 이중 북미지역이 모두 136만7847TEU로 52%의 분포율을 보였고, 유럽이 56만6207TEU로 21%, 아시아가 51만6207TEU로 20%, 중동및 기타지역이 17만5339TEU로 7%를 각각 차지했다.
-다음호 계속-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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