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동남아항로와 마찬가지로 한일항로에도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근해항로 운임 담합 제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공정위 스스로 18년 전 적법하다고 판단한 사례를 정반대로 처분한 데다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효 판결을 받은 유럽연합(EU)의 컨테이너선사 과징금 부과 사례를 제재 근거로 제시하는 등 논란이 커지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9일 한일항로에서 2003년 2월부터 2019년 5월까지 총 76차례 운임을 합의한 15개 선사에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총 800억8800만원을 잠정 부과하고 한중항로에서 2002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총 68차례 운임을 합의한 27개 선사에 시정명령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동남아항로와 마찬가지로 한일항로에도 매출액의 1.2%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부과했다. 하지만 1993년 한중 양국 정부가 맺은 해운협정에 의거해 관리돼온 한중항로엔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듯 시정명령만으로 제재 조치를 마무리했다.
한일항로에서 과징금을 받은 선사는 국적선사 13곳, 외국선사 1곳이다.
국적 근해선사에 제재가 집중됐다. 흥아라인 158억원, 고려해운 146억원, 장금상선 120억원, 남성해운 108억원, 동진상선 61억원, 천경해운 54억원, 동영해운 41억원, 범주해운 33억원, 팬스타라인 32억원, 팬오션 25억원, 태영상선 18억원 순으로 과징금 처분이 내려졌다.
원양선사인 SM상선과 HMM은 각각 1억900만원 4900만원을 맞았다. 중국 국적의 SITC는 외국선사로는 유일하게 과징금 1억원의 제재를 받았다.
한중항로에선 국적선사 16곳, 외국선사 11곳 등 총 27개사가 시정명령 처분을 받았다. 국적선사는 고려해운 남성해운 동영해운 동진상선 두우해운 범주해운 장금상선 천경해운 태영상선 팬오션 한성라인 흥아라인 흥아해운 SM상선 HMM 등 컨테이너선사 15곳과 카페리선사인 진천국제객화항운 1곳이 제제 대상에 포함됐다.
외국선사의 경우 뉴골든씨쉬핑 뉴센트라스인터내셔널 상하이인천인터내셔널페리 소패스트 시노트란스 코스코 코흥마린 톈진진하이마린 EAS인터내셔널 SITC 등 컨테이너선사 10곳과 카페리선사인 위동항운 1곳이다.
공정위는 선사들이 약 17년간 최저운임(한일항로 MGL, 한중항로 AMR), 각종 부대운임 도입과 인상, 대형화주 입찰을 대상으로 한 투찰가 합의 등의 담합 행위를 벌였다고 판단했다. 또 합의된 운임 수수를 실행하려고 다른 선사들의 화물을 침범하지 않고 기존 거래처를 유지하는 ‘기거래 선사 보호’에 합의해 운임경쟁을 제한했다고 주장했다.
운임 합의를 목적으로 회의를 소집하고 합의된 운임 준수를 독려한 한일항로 단체인 한국근해수송협의회엔 사업자단체 금지행위 위반 혐의로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2억4400만원을 부과하고 한중항로 단체인 황해정기선사협의회엔 시정명령을 내렸다.
과거 EU 컨선사 과징금 부과 법원서 무효 판결
이 같은 공정위 결정에 해운업계는 크게 반발했다. 한국해운협회는 이날 성명서를 발표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정기선사들의 운임담합 처분을 즉각 철회해줄 것을 촉구했다.
해운협회는 한중일 3국 중 유일하게 우리 공정위만 제재를 내린 걸 두고 국제 공급망에서 국내 물류 네트워크에만 피해를 줄 수 있는 데다 국제관례와 법령에 반하는 부당하고 일방적인 처사라고 주장했다.
선사들이 해운법상 정당한 협의와 신고를 진행했음에도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했을 뿐 아니라 정작 전 세계 어느 국가도 운임 협의와 신고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는 지적이다.
또 이번 조치로 해운항만산업뿐 아니라 국내 화주에도 큰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나라만의 독단적인 제재로 한국 해운산업이 몰락하고 외국 대형선사는 우리나라 항만을 기피해 국내 수출입화물의 해상물류비가 증가하고 적기 수송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전망이 나온다.
지난 2004년 공정위가 한일항로에 부과되는 최저운임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것도 논란거리다.
국제물류협회(당시 한국복합운송협회)는 2003년 11월 선사들이 한일항로와 한중항로 동남아항로에 최저운임을 도입하자 이에 반발해 같은 해 연말 공정위에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를 문의했다. 국제물류협회는 최저운임은 기본운임인상(GRI) 형태의 운임회복 방식이 아닌 데다 화주와 협의하는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위법한 공동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근해수송협의회를 3일간 조사한 공정위는 2004년 1월께 “선사 간 공동행위는 해운법에 의한 정당한 행위이고 협약절차상의 문제는 해운법 소관업무로 적법하다”고 국제물류협회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사안을 18년 시차를 두고 정반대로 판단한 건 경제검찰이자 준사법기관 역할을 하는 국가기관의 자기부정이란 지적이다.
해운업계는 일본에서 유럽이나 미국 등으로 수출되는 화물을 외국 원양선사의 요청으로 국내 근해선사들이 환적거점인 부산항까지 운송한 행위에도 과징금을 부과한 것도 질타했다.
우리나라 수출입 화주와 무관한 환적화물(피더화물)에까지 제재의 칼날을 들이댄 건 해운업의 기본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공정위의 무지에서 비롯된 처사란 지적이다. 동북아 환적 항만 자리를 놓고 중국 항만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부산항에도 공정위 결정은 부정적인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공정위가 이번 제재 결정을 내리면서 과거 EU가 컨테이너선사에 과징금에 부과하고 주요 국가에서 자동차선사에 과징금 처분을 내린 사례를 근거로 제시한 것도 빈축을 샀다.
EU가 컨테이너선사에 내린 과징금 처분은 유럽연합사법재판소에서 무효 판결을 받았고 자동차선사는 전 세계적으로 운임 공동행위 허용 대상이 아니어서 이번 공정위의 컨테이너선사 제재와 전혀 무관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컨테이너선사에 대해서만 운임 공동행위를 허용하고 있다.
해운협회는 “전 세계적으로 국제 무역 증진을 목적으로 정기선 공동행위를 조약 형태로 인정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이를 해운법에 받아들인 뒤 지난 17년간 해수부에서 합법적으로 관리해왔다”며 공정위 전원회의 결정의 편파성 여부와 국익을 고려한 충분한 역할을 다 했는지 살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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