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해운 선진국 중 우리나라만 해운사 공동행위를 독점금지법 적용에서 면제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 해운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성장을 위해 컨테이너선사의 공동행위를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고병욱 해운정책연구실장은 ‘정기선사 공동행위에 대한 이해 및 정책 제안’ 보고서에서 주요 해운선진국인 미국과 EU 일본은 모두 해운법에 독금법 적용 면제 조항을 두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공정거래법에서 일괄적으로 적용 면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정거래법은 19조2항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요건에 해당하고 공정거래위원회의 인가를 받은 경우 법 적용을 제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동법 58조는 “사업자 또는 사업자단체가 다른 법률 또는 그 법률에 의한 명령에 따라 행하는 정당한 행위엔 공정거래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규정을 근거로 국내 해운업계는 정기선사들의 공동행위가 공정거래법의 잣대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석해왔다. 해운법 29조에서 가입탈퇴를 제한하지 않는 조건으로 정기선사의 운임 계약과 선복 공유 같은 공동행위를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정위의 생각은 달랐다. 해운사 공동행위를 공정거래법 적용 면제 대상으로 적시한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해운시장 운임 담합 조사를 직권으로 벌여 올해 5월 동남아항로를 취항하는 23개 국내외 컨테이너선사에게 최대 8000억원에 이르는 과징금을 부과했다.
고병욱 실장은 시간적으로 해운법보다 뒤에 제정된 공정거래법에 적용 면제 조항을 두면서 이 같은 제도적인 허점이 발생했다고 풀이했다. 우리나라는 국제연합(UN)의 해운동맹헌장에 서명하기 직전인 1978년 12월 해운법에 공동행위 허용 규정을 신설했다. 공정거래법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80년 12월 제정됐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은 1998년 제정된 외항해운개혁법에서 선사들의 공동행위를 허용하는 한편 해운규제당국인 연방해사위원회(FMC)에 제출된 공동행위는 독금법 적용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경쟁당국이 아닌 FMC가 사상 초유의 물류대란과 운임 급등에 대응해 컨테이너선시장 불공정 행위 조사의 칼을 빼든 것도 이 같은 법체계 때문이다.
일본은 1949년부터 해상운송법에 정기선사 간 공동행위의 독금법 면제 규정을 두고 있다. 1990년대 들어 독금법 적용 면제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는 정책이 추진됐지만 외항해운의 독금법 면제 규정은 그대로 유지됐다.
유럽연합(EU)은 130년 이상 지속돼온 운임동맹(shipping conference)은 폐지했지만 선복과 컨테이너박스 항만터미널 등을 함께 사용하는 컨소시엄 형태의 공동행위는 허용하고 있다. 해운컨소시엄 독점금지법 일괄 적용 면제 제도는 2024년 4월까지 연장됐다.
EU는 지난 2008년 10월 운임동맹을 폐지했다. 독립선사의 역할이 커진 데다 컨소시엄이나 얼라이언스 같이 공동으로 운임을 결정하지 않는 협력방식이 증가하고 선사와 화주 간 장기운송계약이 급속히 늘어나는 등 시장 여건이 급격히 바뀌었다는 판단에 기반한 결정이었다.
컨시장 공동행위는 파멸적 경쟁 예방조치
고 실장은 해외 사례를 들어 해운시장의 감독 책임을 해양수산부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평가 의견을 제시했다. 감독 책임의 모호성에 근거해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운사 운임 담합 조사에 나섰고 해운업계와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의견이다.
이와 관련 현재 ‘해운사 공동행위엔 공정거래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해운법 개정안이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의원 발의로 국회에 상정돼 있다. 개정안은 지난달 28일 농해수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고 실장은 해수부로 감독 책임을 일원화할 경우 수출입화주들이 선사 담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다는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대책으로 ‘해운 공동행위 업무처리규정’ 도입을 제시했다. 선사들의 공동행위를 해수부가 직권으로 인지 조사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자는 아이디어다.
아울러 선사들이 부당하게 결항, 선복 축소, 계약 불이행 등으로 화주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조사하는 절차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고 실장은 공정위가 국내외 선사에게 과징금을 부과하면 국내 화주와 선사에게 더 큰 손실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공정위 제재가 오히려 해외 선사들의 한국 기항 축소를 야기해 우리나라 화주가 물류 차질과 운임 인상의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의견이다.
또 역외적용이 되는 경쟁법 특성상 공정위 제재가 다른 국가들의 연쇄적 제재를 불러오고 우리 선사를 대상으로 한 보복적 제재도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컨테이너선시장에서 경쟁 제한을 수반하는 공동행위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운임 공동 결정, 선복 제한 등의 공동행위가 정기선 시장의 수급 특성에서 기인하는 파멸적인 운임 경쟁을 예방하는 충분조건 중 하나라는 견해다.
아울러 운임 공동 결정 또는 협의 방식의 공동행위를 전면 금지한 EU의 경제 이론적 논거가 매우 약하다고 지적했다. 운임동맹 폐지 결정을 내린 보고서는 주요 해운경제학자들이 정기선시장의 공동행위를 옹호하는 논거로 제시하는 컨테이너선시장의 복잡한 구조적 특징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저명한 해운경제학자인 크레이그 피롱(Craig Pirrong)은 지난 1992년 발표한 논문에서 선박 1척당 화주가 작게는 수백곳에서 많게는 2만곳 이상으로 나뉘는 수요의 분할가능성(demand divisibility)이 특징인 컨테이너선시장에선 무제한의 자유경쟁으로는 효율성을 달성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고 실장은 또 “국내 수출입 물류에 긍정적 외부효과(운임인하)를 내고 있는 우리나라 선사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갈 수 있도록 산업정책과 경쟁정책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거대 선사와 글로벌 얼라이언스가 독과점하고 있는 컨테이너 해운시장에서 파멸적 치킨게임을 유발할 수 있는 제한 없는 자유경쟁을 추구하는 건 2016년 한진해운사태와 같은 국적선사의 퇴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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