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임 담합 혐의를 받고 있는 국적선사 12곳에 50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심사보고서를 낸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과 2년 전엔 외항해운사의 공동행위는 공정거래법 적용에서 제외된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해운협회 김영무 상근부회장은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해운빌딩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2년 전 공정위는 가격담합에 대한 공정거래법 적용을 제외하는 대표 사례로 해운기업의 운임 공동 결정행위를 들었다”고 공개했다.
해운협회에 따르면 공정위 카르텔총괄과는 2019년 6월24일 국민신문고 민원 게시판에 “가격담합을 인정하는 예외 사례가 있느냐”는 질문에 “공정거래법상 가격담합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는 관련 규정은 동법 제58조(법령에 따른 정당한 행위) 등이고 대표적인 사례가 해운법 제29조(운임 등의 협약) 규정에 따른 외항화물운송사업자들 간의 운임 공동결정 행위가 있다”고 답한 글을 올렸다.
답변이 게재된 시점은 공정위가 선사를 대상으로 한창 운임 담합 조사를 벌이던 때다. 국민들에겐 선사들의 공동행위가 공정거래법 대상이 아니라고 답해 놓고 현장에선 선사들의 운임 협의를 위법으로 판단하고 조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국민신문고에서 삭제된 가격담합 질문 관련 공정위 답변 |
공정위 가격담합 답변 국민신문고서 삭제돼
공정위 답변이 담긴 게시글은 현재 무슨 이유에선지 국민신문고에서 검색이 되지 않고 있다. 해운업계에서 이 답변을 문제 삼자 공정위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게시글을 내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국민신문고 측에선 게시글이 검색되지 않는 이유를 두고 정확한 내용은 공정위에 직접 문의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해당기관에서 게시글을 미사용 처리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공정위 대변인실은 “글이 내려간 게 의아하긴 하다”면서도 “답변한 부서가 아니면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카르텔총괄과도 게시물 게시 삭제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만 공정위는 국민신문고에서만 이 같은 답을 내놓은 건 아니다. 공정위 홈페이지 주요 상담사례(Q&A)와 정부민원콜센터에도 같은 내용이 고스란히 올라와 있다.
김 부회장은 이날 1981년 10월 공정위 전신인 경제기획원이 해운기업의 공동행위를 허용하는 ‘경쟁제한행위등록증’을 발급했다는 사실도 꺼내들었다.
1980년 제정된 공정거래법엔 경제기획원에 등록한 사업자는 공동행위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해운협회(당시 선주협회)가 해운업계를 대표해 등록증을 발급받았다는 설명이다. 공정거래법 제정 당시부터 경쟁당국의 승인 하에 해운업계의 공동행위가 이뤄져 왔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뒤로하고 공정위는 지난달 23개 국내외 선사가 부당한 공동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심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 2018년 12월 선사 3곳을 압수수색하며 운임 담합 조사의 시작을 알린지 2년 반 만이다.
공정위는 선사들이 운임을 공동으로 결정하면서 공정위의 인가를 받지 않은 데다 해운법이 정하는 절차를 따르지 않았다고 부당 공동행위 근거를 제시했다. 특히 ▲화주단체와 협의를 하지 않았고 ▲해양수산부에 신고를 철저히 하지 않았으며 ▲운임 합의를 달성하려고 상벌제도를 도입해 자유로운 탈퇴를 방해했다고 해운법 위반 사항을 열거했다.
공정위 심사관은 보고서에서 2003년 4분기부터 2018년까지 동남아항로에서 운임 담합으로 벌어들인 매출액의 8.5~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위 전원회의에서 심사보고서를 채택할 경우 국적선사는 5000억원 안팎의 과징금을 물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외국선사까지 확장하면 과징금 규모는 7000억원을 넘어선다.
“운임 협의 모두 해수부에 신고”
김 부회장은 간담회에서 공정위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컨테이너선사의 공동행위는 가입과 탈퇴를 자유롭게 보장하고 있고 운임회복을 위한 협의(기본협의)는 2002년부터 2017년까지 1차례를 제외하고 모두 해수부에 신고했다고 해명했다. 신고한 운임을 준수하려고 행한 122차례의 최저운임 협의(부속협의)는 신고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해수부에 보고할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상벌제도는 운임 공동행위 준수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지 가입과 탈퇴를 제한하지는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김 부회장은 공정위 제재가 최종 결정될 경우 정부의 해운산업 재건 정책에 전면 배치되는 데다 수출물류기업 애로가 커져 국가경제 발전에 저해 요인이 될 거라고 주장했다.
선사들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과징금을 내려고 선박 등의 자산을 매각하면 선복난이 심화돼 물류가 마비되고 해운 경쟁력도 크게 위축된다는 우려다. 외교 마찰이 빚어지고 외국에서 보복조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도 부정적인 대목이다.
김 부회장은 “만약 해운기업의 공동행위 절차에 미흡한 점이 있었더라도 해운법에 따라서 규율돼야 한다”며 “해운법은 운임 공동행위를 규정하고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들어가 있는 그 자체로 ‘완결법’이기 때문에 해운사의 위법행위를 충분히 조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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