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의 참여가 활발히 이뤄졌다. 이순정은 자주 광화문에 나가곤 했다. 사무실이 가까우니 틈만 나면 광장에 나가서 봉사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봉사자들도 이제 이순정이 누구라는 걸 대부분 잘 안다. 서명받기, 영상제작, 기록물정리, 국회농성 지킴이…. 해야 할 봉사는 많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천막을 치자 광화문 광장은 ‘세월호 광장’으로 탈바꿈했다. 유가족과 봉사자들은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항의 농성을 벌였다. 봉사단 간사가 이순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5.18과 4.16은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는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어요. ‘광’ 자로 시작되는 광주와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정의를 위해 싸웠죠.”
“그러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이순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사상 최대의 구조 작전에도 선내에 있는 사람을 한 명도 구해내지 못했어요. 사상 최대의 창피한 작전이었죠.”
간사는 뉴스 기사 내용을 빗대 세월호 구조 작업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대한민국의 민낯이 드러난 셈이군요.”
“2014년 이후 우리 삶에서 생존 자체에 물음표가 생긴 겁니다.”
“….”
간사는 너무 진지했으나 이순정은 이런 경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세월호는 구조적으로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킬 배였어요. 단원고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사실 사고가 났던 그날 제주 오현고 학생들도 세월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 수학여행을 위해 여객선 승선을 준비 중이었다.
진학과 취업을 포기하고 시위에 참석한 고3 여학생은 노래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했다. 기타를 잘 치는 그녀가 자주 불렀던 노래는 <이름을 불러주세요>였다.
304명의 희생자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는 게 노랫말의 전부다. 그녀는 이순정을 만나 미수습자 가족이 “우리들 소원은 유가족이 되는 것” 이라고 말했을 때 미칠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고 털어 놓았다. 예쁘장한 얼굴답지 않게 봉사의 결의가 찬 그녀에게 이순정이 물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바뀐 게 있니?”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내 의견이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져요.”
“소원은 뭐야?”
“모두가 제 명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곳도 텅 빈 광장이 됐으면 좋겠어요.”
이순정은 아이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서글펐다.
2015년 봄은 다시 시작되었다. 속도 모르고 벚꽃은 활짝 피었다. 영석 엄마는 벚꽃이 싫다고 했다. 봄이 싫고 고통스럽다고 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46일간 단식하며 650만 국민 서명을 이끌어내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되고 세월호특조위가 구성되었다. 영화 <다이빙 벨> <나쁜 나라> <업사이드다운>이 주목을 받으며 상영되었다. 사고가 난 지 197일째 되던 2014년 11월 29일 296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이순정은 광장에 있는 유가족과 대화를 나누었다. 가족의 생활이 궁금해서 물었으나 대답은 가슴 아팠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행복이 없어요.”
“…”
이순정은 차분히 그를 보았다.
“자식이 행복할 때 가장 행복한 거니까요.”
“아무리 오래 걸려도 싸움을 하실 건가요?”
“그럼요. 엄마니까 당연히.”
광장에는 외치는 사람이 늘어났다. 자원봉사단 진실마중대는 서명 식사지원 피켓시위에 마음을 다해 참여했다.
“밥을 해 갖고 오는 사람이 가장 고맙지요. 맨날 사먹으니까요.”
“서명을 귀찮아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서명을 목숨처럼 생각하고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간곡히 부탁해요.”
인터넷카페 엄마손 회원들은 노란 리본 만들기를 도왔다. 촛불을 들었던 엄마들은 리본을 달고 서명운동에도 참여하며 활동 폭을 넓혀갔다. 그 즈음 416연대가 발족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이어나갔다.
광화문에서 첫 촛불이 켜진 건 세월호가 침몰하고 4일이 지난 2014년 4월 20일이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내팽개쳤다고 분노했다. 며칠 뒤 임형주가 세월호 추모곡으로 헌정한 번안곡 ‘천 개의 바람이 되어’가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촛불에 힘을 보탰다. 유가족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노숙에 들어가는 한편 광화문TV를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알리는 일을 벌였다.
그런가 하면 민변 출신의 박주민 변호사는 세월호 유가족의 권리를 찾아주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이미 쌍용차 정리해고,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밀양 송전탑 등 사회적 갈등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깊숙이 관여해 거리의 변호사란 별칭을 얻은 터였다.
“변호사가 여길 왜 와?”
처음에는 유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차츰 그의 진심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에게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면 좋아하죠. 자기 이름은 필요 없고 애들 이름만 부르면 됩니다.”
그는 부모의 마음을 파고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유가족들은 인형탈을 쓰고 지원유세에 나서는 등 그의 금배지를 위해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
2016년 7월 여름, 이순정은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리본 공작소에 들렀다. 더운 날 애쓰는 봉사자들에게 냉커피를 사드리기 위해서였다. 답례로 받아온 노란리본은 홍소라와 친구들 가방에 하나씩 달렸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2016년 10월 23일 최순실과 정유라가 언론 지면에 오르내리고 의혹의 그늘이 박 대통령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국정농단 사태의 서막이었다. 8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다. 10월 29일 국정농단 촛불집회가 시작된 이후 집회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리본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드는 건 리본(ribbon)이 아니라 리본(re-born)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재탄생의 염원을 담았다는 의미다.
이게 국가냐, 우리가 국민이냐?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모인 자원봉사자들은 구호를 선창했다.
“촛불국민 만세!”
2017년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광화문 416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선 구호가 간명해졌다.
“미수습자 수습! 철저한 진상규명!”
세월호는 혼자만 넘어지지 않았다. 기어코 박근혜 정부를 넘어뜨렸다. 이를 두고 촛불이 지속적으로 광장을 밝힌 결과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416가족협의회와 세월호특조위 조사관, 시민 연구자들이 모여, 국민의 힘으로 진상을 규명하자는 취지로 2017년 1월 ‘416세월호참사 국민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 조직이 세월호의 진실을 인양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지 이목이 집중됐다.
<이 작품은 세월호 사고의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한 창작물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업 지명 등은 실제와 관련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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