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내항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10m에 달하는 독특한 항만입니다. 과거 인천의 핵심 무역항이던 제물포항은 조수간만의 차로 선박 입출항이 어려웠죠. 1918년에 최초 갑문식 선거(船渠)인 제1선거(현 내항 1부두)가 조성된 배경입니다. 내년은 내항이 갑문과 함께한 지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갑문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했으면 합니다.”
갑문은 상하류 수위를 조정해 선박의 원활한 통항을 돕는다. 제1선거는 제물포항의 화물수입에 큰 역할을 했지만 조수간만의 차를 조절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바닷물이 차오르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의 내항은 총 8문으로 1974년에 동양 최대 규모로 완공됐다. 독일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파나마운하의 존재를 전해듣고, 독일로부터 차관을 얻어 6문을 축조했다.
인천항만공사(IPA) 갑문정비팀은 갑문을 관리해 내항수심 7m를 유지하고 있다. 수심을 맞춰야 선박 입출항과 하역작업이 가능하기 때문. 갑문정비팀 수장인 김종택 부장은 26년간 내항 갑문의 유지보수를 도맡은 갑문 전문가다. 김 부장은 갑문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 사회생활은 정반대의 길이었다.
“제 첫 직장은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였습니다. 하지만 공직에 계셨던 아버지를 보다보니 자연스레 공직에 눈이 가더라고요. 직업이 안정적이란 점도 한몫했죠. 때마침 옛 해운항만청이 직원을 모집하면서 자리를 옮기게 됐죠.”
1987년, 그는 꿈에 그리던 여수 해운항만청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 앞에 그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해운항만청에서 받은 제 첫 급여가 이것저것 공제하다보니 1만5000원밖에 안 남더군요. 제가 아시아차에서 받던 월급여가 40만원이었어요. 저로선 여길 계속 다닐지 말지 고민의 연속이었죠. 저 혼자 살았다면 당장 관뒀겠지만 당시 결혼하고 애들까지 있던 터라 가장으로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5년만 버텨보기로 마음먹었죠.”
그는 공직은 5년 이상을 버텨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렇게 ‘5년만’하고 견디던 그는 1992년 인천으로 넘어와 갑문 관리를 맡게 됐고, IPA가 발족되면서 항만공사 식구가 됐다.
갑문정비팀은 지난 5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비한 ‘스마트갑문’을 조성하기 위해 산하에 설비혁신팀을 신설했다. “갑문관리는 수위와의 싸움입니다. 갑문 외항수위가 1.2m 미만이면 문을 못 열어요. 문제는 갑문 노후화로 유지보수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일단 설비혁신팀이 수위관측시스템 개발을 올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또 레이저나 레이더를 도입해 갑문 수위를 손쉽게 관리할 예정입니다.”
업무가 없는 주말엔 아내와의 산행을 즐긴다고 한다. 마음의 풍요가 등산만의 매력 포인트라고. “주말마다 집사람과 경기지역 명산을 찾아 등산하고 있어요. 하산 후 맛집탐방이 묘미죠.(웃음) 앞으로도 전국 명산을 찾아 단출하게 떠날 계획입니다.”
< 류준현 기자 jhryu@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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