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특히 필자의 병영생활은 최전방의 1군사령부 직할 독립, 화학전투지원중대(화생방/CBR)에서 육군대위 중대장과, 대학동기 학군단(ROTC) 출신 소위를 하늘같이 모시며 모범사병(?)으로 일반하사 10호봉(개월)을 달고 만기제대한 화확장비 정비병(MOS 433) 출신인지라 영관급도 제대로 못 보고 하사 제대를 했으니 붙어있는 별이건 떨어진 별이건 별이라면 말만 들어도, 그림자만 봐도 경외의 대상이었는데 오나 가나 별을 자주 볼 수 있다는 건 퍽이나 자랑거리였다.
그러니 직장에서 늦게서나마 별들과의 만남이 많다가 드디어 별 넷을 직속상관(?)으로 모시다 보니 모자와 어깨와 가슴에서 은하수처럼 별들이 무리지어 번짝이는 별 모종(?)을 보는 순간이 오기도 했었던 것.
그래서 그 당시나 지금도 별을 두서너 개 단 현역들을 봐도 크게 놀라지 않는 버릇이 생긴건 사단장이나 군단장 당번병을 했어도 영관급은 별로(?)로 보이더란 애기와 비슷한 맥락이리라.
신혼 여행후 종로 연건동 자택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용무장군 내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홀로 지낸지 7여년만인가의 외로움을 훨훨 떨쳐버리고 소꿉장난을 하듯 깨가 쏟아지게 행복해 보였다.
40대 중반까지 오로지 공무와 학문에만 몰두하느라 세상이나 남자의 숨결을 모르고 지내던 이국장도 열아홉 처녀가 초립동 신랑을 맞아 시집을 간듯 수줍음 가운데 새로이 시작한 제2의 인생이 행복하고 늦게나마 의미있는 삶을 누리는듯 명랑하고 행복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당시는 국가 중앙부처 공무원의 경우 2급, 이사관 이상 국장급이면 전속 운전기사와 함께 출퇴근 및 업무전용 승용차가 지급될 때라 아침 출근 시간이 되면 김이사장 자택엔 한 대문에 매일 아침 두대의 승용차가 각각 김이상과 이국장 부부를 모시고 가는게 진풍경이기도 했었다.
하긴 자가운전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대개의 경우 전문 운전기사가 차량운전을 하는게 원칙처럼 돼 있었고 게다가 공직에 있는 부인이 소속기관이 지급하는 전용 차량으로 출퇴근을 하는 경우는 지금에도 상당히 드문 일이 아닌가 모를 일이다.
여하튼 남편과 부인 운전기사가 아침 저녁 출퇴근시에 만나 교환하는 정보를 퉁해 임직원들은 그날 그날의 심기(心氣) 기상도를 미리 읽을 수 있어서 예측이 어렵게 갰다 흐렸다를 자주 반복하는 이사장의 돌발 사태에 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건너던 농담이 새삼 생각이 난다.
결혼 후로도 비록 횟수가 줄긴 했지만 이사장 내외분의 퇴근길 술자리에 필자와 고초근 부장은 자주 불려다녔다.
거나하게 취하면 신혼부부가 자는 잠자리 구경을 시켜 준다며 늦은 밤 자택으로 가서 침대 위에서 한 잔씩을 더 보태던 기억은 이를 주도하는 김이사장 보다도 싫은 내색을 하거나 혀차지 않고 손아래 귀염둥이 시동생들 아끼듯 대해주던 이국장 모습이 선하다. 한참 뒤에사 1급 관리관급으로 승진하여 경주박물관장을 지낼때 언제 함 놀러오란 통화가 필자와는 마지막이었다.
그 뒤에는 신문지상을 통해 공직 퇴임후 부산 소재 동아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사실을 알았고 가끔은 문화재나 고미술 및 고궁 박물관 등에 대한 진단이나 이슈가 있을 때마다 활자매체들과 인터뷰를 한 사진이나 기사를 읽으며 아직도 여전히 그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얼굴을 그려보며 옛 생각을 하던 일도 이젠 상당히 오래다.
그리고 김이사장의 첫 임기 ’76~’77 양개 연도가 끝나고 ’78년 들어 이맹기 회장과 김용배 이사장은 ’78년부터 한 임기를 더 하게 되었다. 임기 첫 해 '76년에는 3월 13일을 기해 ‘항만청(KPA)’이 발족했고 이 날을 기념하기위해 이듬해부터 ‘해운의 날’이 제정, 시행하게 됐다.
설립초반 현대조선(지금의 현대중공업)에서 건조된 대형유조선(VLCC) 3척이 석유파동(Oil Shock)으로 인해서 발주자인 그리스의 리바노스 선주에게 인도가 되지않자 지금의 현대상선 전신인 ‘아세아상선’을 설립한 것도 이때다.
협회는 본선과 선원업무 등을 체계적이고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비상설 의결기구로 ‘해무위원회’를 만들어 운영에 들어갔다. 당시 주요 수출입 품목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의 원목수송을 원활히 하는 기구로 한-인니 원목수송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전담하는 상설기구를 협회 내에 상주시키기로 결정하던 기억도 새롭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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