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남 편집위원 |
김 이사장이 가장 선호하는 호칭은 역시 네 개의 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영원히 간직하고픈 애착과 향수와 그 밖의 삶 전체를 별 넷에 담고 싶어 하는 호칭 ‘김 대장님!'’ 아니었던가 싶다.
참고문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에 의하면 1923년 4월21일 서울 출생으로 1942년 전국의 수재들만 모였다는 경기고등학교(경기고보)를 졸업하고 서울법대(경성법전)를 거쳐 군사영어학교에 입교, 46년 졸업과 동시에 군번 10077의 육군소위(당시 참위)로 임관 후 제1연대 C중대의 편성소대장으로 발령을 받은게 본격적인 군생활 첫 출발이었다.
이어 7연대와 13연대 시절 중령을 달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1월 육군참모학교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6.25전쟁을 불과 보름 앞둔 6월10일에 제8사단 21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휴전 후 육군소장으로 부대정비 및 전후 복구에 주력하다가 미 지휘참모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은 후 육군본부 인사국장과 기획참모부장을 역임했다.
필자 기억에 남게 전해들은 에피소드로는 미국서 교육기간 중 초기에 ‘히어링’도 어렵고 ‘스피킹’도 잘 되지 않을 무렵 강의실서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들락날락하며 소란을 피우는 네이티브 클래스 메이트들에게 화가 치밀어 성질을 한번 부리고 싶어도 뜻대로 표현할 줄을 몰라 궁리 끝에 용기를 냈단다.
“야아 이놈들아 와이(Why) 비콰이어트(Be Quiet), 비사일런트(Be Silent) 하지 못하고 이리 컴(Come) 저리 고우(Go) 하고 야단들이야!” (왜 수업시간에 조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느냐)하고 큰 소리를 질렀더니 조용해 지더란 궁즉통 얘기를 가끔해서 함께 웃곤 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육본에 근무하던 동안에는 각종 위원회의 위원으로 발탁되어 자신의 능력을 과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필자도 어슴푸레 기억하고 있는 1956년에 발생한 방첩대장 ‘김창룡(金昌龍) 중장 살해사건’의 조사위원, 장교진급심사위원 등으로도 활동했으며 59년 7월에 제1군단장에 임명된 뒤 연속으로 제5군단장을 지냈다.
4.19가 일어난 1960년 육본 정보참모부장을 거쳐 61년 1월 육군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초급장교 육성에 힘썼고 4년 임기를 마치고 드디어 1965년 4월 1일 대망의 육군대장으로의 진급과 동시에 제17대 육군참모총장으로 66년 9월1일 예편할 때까지 육군의 수장으로 우리 군 발전과 국방에 크게 기여한 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2군 부사령관 시절부터 친히 지낸 인연으로 해서 각별했던 탓인지 특별히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천성이 군인이었던 김 이사장은 퇴역하던 이듬해 67년에 충주비료 사장, 68년에 대한중석 사장, 73년에는 당시 독일 이젠백과 삼기물산이 공동 출자한 것으로 기억되는 한독맥주의 사장도 역임하는 행운도 누렸으나 청렴한 군인임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하늘 같이 모시고 함께 근무하면서 필자는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느 지역 전투, 어느 고지 싸움과 탈환 및 후퇴와 철수 등 수많은 무용담을 들었건만 마지못해 건성으로 들어 지금 구체적으로 공적을 알 수가 없는 게 아쉽다.
그러나 전사(戰史) 자료에 의하면 6.25 당시 동해안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8사단이 전쟁 발발 당시 2개 연대밖에 갖추지 못한 상태로서 38도선에 제10연대를 배치하고 제21연대는 예비부대로 삼척에 대기 중일 때 연대장으로 발령받고 부임한 김용배 중령은 북한군 제5사단이 6월25일 04시 공격준비 사격과 더불어 38도선을 돌파하여 주문진으로 진격을 개시하여 강릉지구 전투를 실시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이어 6월 말부터 7월 초에 이르기까지 단양전투를 전개, 북한군 제8사단의 진출을 일주일간이나 지연시킨 후 이어 풍기, 영주에서도 적의 진출을 10일간이나 저지하는 전과를 보였다. 이어 제21연대장 직을 맡은 김용배 대령은 제3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51년 5월 28일 제7사단장으로 복귀, 육군준장으로 진급하여 백석산 917고지 진격전을 전개했다.
그해 8월로 접어들어 618고지, 901고지, 883고지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732 양갈래고지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서남지구전투사령관, 진주지구위수사령관, 육군보병학교 부교장, 육군본부 인사국장을 지낸후 53년 2월에 미 제25사단과 임무교대를 하고 소장으로 진급하여 백석산 지역을 제20사단에 인계하고 양구로 이동,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던중 중공군의 6월 대공세를 맞게 된다. <계속> < 서대남 편집위원 dnsuh@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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