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영원히 머물고 싶은 삶의 무대”
원양어선 船長 천금성(千金成) 海洋소설가 - (중)
전원생활을 꿈꾸던 서울대 출신의 제1호, 최초의 원양어선선장. 원양어업훈련소 입소자격 요건 결여에도 불구, 1등으로 합격했으나 난생 첨으로 끝없이 광활하고 깊고 푸른 인도양 한 복판에 당도하여 천 작가는 바다라는 대 자연의 냉엄함과 위대함에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반년쯤 항해를 하자 바다가 점점 여성처럼 부드럽고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하게 느껴지며 가슴에 다가왔다. “아! 바다는 내 것이다!” 그가 바다 정복(?)에 나서면서 부르짖은 첫 마디였다.
인도양 항해와 조업중 말단 항해사인 그는 매일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가 당직(Watch Keeping)이었는데 어둠에 비친 별빛을 바라보면서, 밤물결에 명멸하는 야광충들의 군무에서 “아! 바다는 살아있구나!” 그렇게 전율하면서 그 느낌을 메모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밤 물결에 명멸하는 夜光蟲에서 ‘산 바다 느낌’ 메모 作品化
그리고 그해 시월 그 메모를 토대로 엮어 창작한 한편의 단편작품 제목이 ‘해발 0미터’를 뜻하는 <영 해발 부근(零 海拔 附近)>이었다고 한다. 4전5기의 홍수환 복서가 “엄마! 나 참피언 먹었어!”란 감격으로 유명한 남아공의 ‘더반’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당선소감까지를 첨부하여 그 작품을 한국일보 신춘문예 응모작으로 우송했던것. “우리 한국문단으로서는 최초로 이제 해양작가를 보유하게 되었다.”고 최종 심사위원 김동리와 황순원 소설가는 흥분했었다고 한다.
“출항을 앞두고 기적을 울릴 때마다 저는 언제나 웁니다.” 비록 바다가 자신만의 바다는 아니지만 바다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향같은 바다로 가면서 슬퍼지는건 순전히 바다에 대한 경외감 탓 일거라고 그는 진단한다. 바다에서 죽어야 경외스런 바다에 보답하지 않을까 싶다는게 천 선장이었다.
천 선장은 부산에서는 해양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해양문학의 붐 조성을 위해 부산 충무동의 동백서점에서 곧 독자와 작가의 대화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털어 놓는다. 그리고 산간벽지의 사람들에게 까지도 바다의 진면목을 알릴 수 있는 대하소설을 구상중이라고 밝혔다.
“<이제 다시 바다로 가 봐야겠네>의 이 시인 메이스필드의 싯귀처럼 천 선장은 오는 8월이면 연가를 끝내고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된다. 그의 항해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미리 기원해둔다.”로 고유석 기자는 글 끝을 맺었다.
▲ 군함타고 海軍소재 다양한 집필활동, 명예해군증 4호기록
원양어선 선장 출신 천금성 소설가는 196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후 본격적으로 문단에 데뷰한 후 주로 해양을 무대로 하는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계속 내 놓았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체험하기 어려운 바다를 배경으로 쓴 작품들인 데다가 당시 우리의 외항해운 세력이나 원양어업의 국가경제적 비중이나 국제적 지위가 다락같이 치솟을 때라 발표되는 작품들이 매번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2002년 11월 4일자 국방일보의 윤원식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바다와 해양뿐만 아니라 해군을 소재로도 다양한 집필활동을 펼쳐온 천 선장 소설가는 해양의식을 고취한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해군으로 위촉되어 해군증(海軍證)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2002년 대한민국 해군은 드물게 천금성씨에게 제4호 명예해군증을 수여한 것이다.
천씨는 <지금은 항해중>, <바다의 꿈>, <은빛 갈매기> 등 다수의 해양소설과 해양드라마 <남태평양의 3천마일>의 시나리오 집필, 해양 다큐멘터리 <오대양을 가다>의 제작 참여를 통해 국민들의 해양의식을 고취하는데 일조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은 것. 또 2001년 순항훈련 함대와 2002년 림팩(rimpac)훈련에 동승한 체험을 각각 ‘해기(海技) 2월호’와 `’신동아 9월호’에 게재하여 바다와 해군력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제고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특히 해양에 관한 천 작가의 저술들은 한국 원양어업훈련소 어로학과를 수료하고 항해사 자격을 갖고 있는 작가 본인이 1970년부터 78년까지 원양어선 선장으로 대양에 출어한 경험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여타 해양소설보다 생동감 있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리얼리티의 진수’를 보인것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한국 해양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 해군소설인 <오션 고잉(Ocean Going)>을 집필하고 있던 천 작가는 앞으로도 해양문학 발전에 적극 앞장서 나갈 계획을 천명하기도 했다. 한편 전술한 해군 발전과 해양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한 민간인에게 해군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수여하는 명예해군증은 해군 창설 이후 당시까지 오로지 오직 4명에게만 수여된 값진 영예로 알려졌다.
▲ 中短篇 7편 모아 ‘漁夫 바다로 안 가다’ 항해체험 창작집
제1호 명예해군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요트로 태평양을 단독 횡단한 강동석씨, 제2호에는 해군교육사령부에 자진 출강하여 강의를 지원한 서정대씨, 제3호에는 방송작가인 오진근씨가 선정된 바 있었다. 그 이후로는 장편소설 <해신(海神)> 의 작가 최인호, <바다로 세계로> 를 연재한 문창재 언론인, 팔미도 등대작전 KLO부대장 최규봉옹, 천안함재단 조용근 이사장, 현대중공업 김정환 전무이사등 해군발전에 공이 큰 인사들에게 최근까지 13호까지 수여됐다고 한다.
한편 2008년 1월23일 지면을 통해 당시 천금성 작가를 가까이서 취재했던 부산일보 이상헌 기자(현 문화부 팀장)는 한마디로 천 선장을 일컬어 “스물일곱 나이에 처음 바다로 나가 10년간 선장을 하고 지금껏 바다를 맴돌고 있는 해양소설가 천금성에게 바다는 각별하다”고 했다. 며칠전 이를 확인하는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도 이 기자는 “천금성 = 바다”라는 등식이 걸맞다고 그를 만났던 소감을 전했다.
그가 여섯번째 창작집 <어부, 바다로 안 가다>를 내놨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지 40년 만이고, 첫 창작집 <허무의 바다>를 낸 뒤 30년 만이다. 억류 선원의 이야기를 담은 <진주 캐는 사나이>, 초기 항해사 시절의 체험을 담은 <1868년 인도양 흐림>, 북극해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한 <바이킹의 후예> 등 7편의 중단편을 모은 창작집이었다.
중편 <어부, 바다로 안 가다>는 송사에 휘말려 배가 압류된 선주 겸 어부가 자신의 배를 몰고 바다 한가운데서 자폭한다는 내용. 교묘하게 자신을 피고로 몰고가는 여인, 억울한 어부의 심정과는 달리 형평성을 잃고 형식적인 재판으로 일관하는 재판부에 대한 어부의 항의였다. 육지에 있긴 싫고 바다로 나갈 수도 없었던 심정이 자살로 표출된 것.
이상헌 기자는 이렇게 썼다. 천금성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두환 자서전 집필작가’라는 오명. “출판사서도 일절 청탁이 오지 않았어요. 문단에서도 손가락질을 했고요.” 술도 많이 마셨다. 회한 때문일까? 그 말을 하면서 다 큰 어른이 기자 앞에서 어깨를 들먹거렸다고 했다.
▲ “생텍쥐페리 닮고싶다” 해양문학가協 초대회장맡아 활약도
바다를 떠나서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동원산업을 찾아가 “말단 어부로라도 제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해 달라” 는 간청을 한 뒤에야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육지에 좌초된 지 10년 만이었다. “그런 고비가 있었기에 해양문학이 내 길이란 걸 새삼 알게 됐어요.” 6개월간 선원으로 배를 탄 뒤 작품이 술술 풀렸다고 했다. 바다를 멀리하곤 못 살 팔자?
환갑이 넘어 수병계급장을 달고 해군 함대에 편승해 <가블린의 바다>라는 해군소설을 쓰기도 했고, 또 한국해대 학생들 틈에 끼어 실습선 ‘한바다호’에 승선한 뒤 상선에 대한 소설도 쓸 참이라고 했단다. 필자도 1979년 한바다호를 타고 대만의 키룽, 일본의 나가사키, 버마의 랭군(현 미얀마의 양곤), 인도의 캘카타(현 콜카타) 등지로 두달간 원양항해를 했으나 하선후 항해기 한 줄 못 남긴 무능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라 느낌이 남다르다.
또 그 해 1월 부산일보사 대강당에서 등단 40주년을 기념해 첫 작가사인회도 가졌다고 했다. 구모룡 한국해양문학가협회 회장의 ‘천금성의 문학세계’에 대한 강연과 김광자, 이윤길 시인의 축시 낭송 등이 있었고 처음으로 작가사인회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것도 “그동안 쭉 해양소설을 써 왔던 천금성이 살아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였다”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정찰비행을 나섰다가 지금껏 미귀환인 채로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을 생텍쥐페리를 닮고 싶다”는 그는 “바다에서 영원히 잠들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배우가 무대에서 생을 마치고 싶은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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