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11 17:00
KSG칼럼/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36)
H선사에 가서 다시 일을 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숙고는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그러나 결론은 즉시 딴 데서 났다.
느닷없이 신문용지와 철구조물, 핫코일 등을 실어가기 위해 군산항에 정기적으로 콜링하는 노르웨이 선적 ‘스타쉬핑(Star Shipping)’의 국내 대리점을 보는 ISA상운의 조병준 사장으로부터 면담을 요청하는 전화가 온 것이다.
세계해운 효시로 50년대부터 유럽과 극동지역 정기항로에서 맹활약 하다 십수년전 보유선박 전부를 처분하고 국제대리점 전문 업종으로 변신한 영국계 벤라인(Ben Line Agencis)에서 한국대표(본사주재원)를 뽑아 상주시켜 영업을 강화하고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는 것이었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교통부 출입기자 시절 당시 한국의 총대리점을 보던 H해운을 통해 BBS(Barber Blue Sea)와 함께 벤라인은 눈과 귀에 아주 익어 낯설지 않은 이름이라 친근감이 갔다.
ISA商運 조병준사장 권유로 영국계 Ben Line 韓國代表 맡아
또 ISA는 필자가 군산 영업을 할 때 고정 거래처로 몇 년간을 함께 일해 온 데다가 조사장은 대학의 선배였고 캠퍼스 커플로 부인까지도 알고 있는 터라 스스럼없는 사이인데다가 D마린을 정리해야 하는 시점과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일단 본사 면접절차를 밟기로 했다. 매번 이력서를 쓸 때마다 그랬듯이 전공란에 영문(?)도 모르면서 영문학과(English Literature)를 기재하기가 쑥스러웠고 가뜩이나 영어의 본고장 영국계가 경영진이고 주요 간부들이고 보면 울렁증이 도질까 걱정도 됐다.
며칠 뒤 항공권을 보내 호텔까지 지정하고 본사로 와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라는 전갈이 왔다. 배를 타고 말라카 해협을 통항할 때나 관광으로 찾을 경우와는 사뭇 다른 일종의 해외취업이라 생각하며 창이공항에 내리니 제법 긴장되었다.
회사출범 본바닥인 런던에 본사가 있긴 했으나 대리점과 선주상호보험(P&I) 전문으로 전업하면서 비즈니스 헤드쿼터는 환상적인 녹색 도시국가 싱가포르 캔턴멘트 200번지, 컨테이너 갠트리 크레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사우스포인트 항만에 붙어 있었다.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테일러(Demort Tayor) 사장과 팀(Tim Eyenon) 매니저를 만나 장시간의 면접 후 셋이서 식사를 한 후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받고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프레젠테이션은 얼굴 익히는 형식적 상견례였고 필자의 취업 여부와 급여나 대우 일체가 조사장에게 위임된 상태였었다.
앞서 군산의 K항업이나 D마린과 마찬가지로 주는 대로 받는다는 필자의 재취업 오퍼 원칙 아래 상호 필요시 언제나 근로계약을 해지할 수 있게 하고 일정액의 급여 외에 필요한 경비는 지출후에 증빙서 첨부해서 신청하는 극히 단순한 조건에 합의했다.
생애 다섯번째의 일터가 결정된 것이다. 취업과 결혼은 생애 처음 선택한 한번을 평생 유지하는게 제일 행복하다고 했으나 필자는 이미 여기가 몇 번째란 말인가? 그러나 예순을 넘은 중늙은이가 다시 품팔이를, 그것도 외국선사 ‘레프(대표)’라고 하니 지인들은 대단한 자리로 알고 모두 부러운 눈이라 선망의 대상이 된 듯도 했다. 그 나이에 재주가 좋다느니 능력이 있다느니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한마디씩 건넸다.
외진 코너에 파티션으로 고즈넉히 둘러 막아 새 책상을 놓고 한달여간 무위 실습(?)을 마친 뒤 다음해 2004년 1월부터 정식 근무에 들어갔다. 부산지사를 합해 30여명 남짓한 벤라인의 한국 대리점 ISA상운의 임직원들은 벤라인 외에도 다수의 외국선사 대리점 업무와 케미컬탱커 크리닝, 포워딩과 무역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종류의 업무를 취급하고 있었다.
2004년부터 근무, 英文報告와 외국선사 적응훈련 걸음마
대기업 근무시 해운을 취급할 때 벤라인 업무를 경험했던 조병준 사장은 벤라인 본사의 테일러 사장과는 막역한 사이로 친했고 ISA상운을 경영하게 되자 그 인연으로 해서 벤라인과 상호 업무 유대를 돈독히 해 왔고 필자가 부임하기 전까지는 여러 스텝들이 나눠서 하던 일을 레프인 필자에게 전담으로 이관시키는 순서를 밟았던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한국 선사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영업망을 구축하고 이를 확충하기 위해 벤라인이 레프역으로 필경 재활용품(?)을 선호했으려니 필자를 뽑은 것은 활용도나 가격면에서는 단연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짐작됐다.
그리고 조병준 사장은 용산고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60학번)를 나와 한진과 대우그룹을 거치면서 해상운송을 익힌 거구의 인상좋은 미남형으로 평판이 나 있었고 경영하는 동업종 단체의 임원직으로 활동하는 중견급 회사의 최고경영자였다.
우람한 체격과는 달리 만사를 안전위주로 세심하게 업무를 처리했고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매사를 원리원칙대로 용의 주도하게 짚고 넘기는 정도 코스맨으로 보였다. 군대조직으로 일컫는다면 필자는 싱가포르의 벤라인 본사 예속(隸屬)에 현지 주둔지 사령부 ISA에 배속(配屬)된 직할독립 1인 파견부대의 대표, 부대장격(Rep.)인 셈이었다. 혼자서 북치고 장고치는 ‘나홀로’조직의 대표 겸 사환이라고나 할까?
해운계 일반적인 관행이긴 했지만 뭣보다 “대표(代表)한다” 는 의미의 ‘한국대표(Korea Representative)’란 직함이 남 보기에 마치 ‘대표이사(代表理事)’즉 ‘사장’이란 직위와 동일한 것으로 착각 오해되어 곤란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명동과 붙어 있는 을지로 2가의 익히 아는 천경해운 사옥 ‘보승빌딩’11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10층에는 필자에게 모두가 낯익은 ‘한국해사문제연구소(이사장 박현규)’가 자리해 제집 드나들 듯 언제나 오갈 수 있어 심심찮았고 너무나 편리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 결론은 버킹검. 외국기업으로 바뀐 명함을 들고 또 다시 새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한 선사의 운항팀 세일즈 방문과 업무유치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결국은 비즈니스와 연관지어 일감을 따다 나르는게 주임무였던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Worldwide 同種 先發업체 의식않고 나홀로 세일즈로 營業
지금도 누가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당시 듣기로는 바윌(Barwil)이니 자딘(Jardine)하며 인치케이프 (Inch Cape) 등등 선발주자로 유사 경쟁업체가 많았고 이들의 커버범위는 전 세계적(Worldwide)이라고 했다. 그러나 벤라인은 세계 해운의 종주국 런던에서 출발하여 100년이 훨씬 넘는 유구한 역사(Carrier)와 지난날의 화려한 명성(Reputation)과 그리고 유기적인 조직망(Network)이란 3박자에 이 바닥의 세일즈 감초(Joker) 필자로 한박자를 더해 4박자, 4대강점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돌격앞으로!’진군의 나팔을 불며 깃발을 올렸다.
수년후의 시체가요 송대관의 ‘네박자’ 는 BLAK(Ben Line Agencies, Korea:벤라인 한국사무소) 로고를 패러디 하거나 흉내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공략대상은 전(前)과 동(同)이 아니면 대동소이(大同小異)렸다. 컬러풀하고도 스마트하게 브리티시 잉글리시(?)로 만들어 보낸 브로슈어(Contact Sheet)를 들고 거기다 티나게 깨알같은 영짜로 앞뒤를 빈틈없이 메운 명함을 내 보이며 찾아 갈 곳이란 취급업무 내용은 달라도 고객은 군산시절이나 다름이 없이 거기가 거기였다. 한 대문만 빠져도 계집자식을 굶긴다는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읊은 타령이리라. 상투적인 세일즈 기법 역시 판박이일 수 밖에 없었다. 네박자 포맷에 의거 역사와 명성 등을 읊은 뒤 국제대리점 업무를 벤라인만이 유일하게 아시아 일원을 대상으로 특화한 점을 강조했다.
每年 두차례 싱가포르 本社매니저 訪韓, 거래처 點檢 및 商談
이어 싱가포르 본사를 비롯하여 캄보디아, 중국, 홍콩, 인도,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대만, 태국, 베트남 등 15개국에 60여개의 직영 사무소를 두고 “숙련된 전문 인력 1,500여명이 유창한 외국어 구사와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신속 정확하게 신뢰성을 바탕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판박이 장사치의 상투버전이었으나 가슴에는 늘 시와 별을 담고 다녔다. 하늘을 보고도 못 따는 별?
앞서도 수차 그러했거니와 손바닥 보듯 빤히 낯익은 마당에 통반장(?)까지 모두 아는 터이고 한땐 쥐락펴락 했던 업무와 인맥에다 플러스 알파로 각별한 연고까지를 감안해서 시작한지 6개월, 늦어도 1년 정도면 뭔가 확실히 손에 잡히리란 예측은 애당초 무리였다. 배가 아시아 일원에 기항을 하게 되면 자체 네트워크나 총대리점(General Agent) 계약이 없다면 벤라인을 이용해 달라는 단순 공식에 갖가지 순열과 조합의 함수를 대입해도 문제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역시 잘 안다는 것과 비즈니스로 거래를 튼다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자가 생기지 않는 한 누구나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거나 열심히 발품을 팔고 볕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원초적인 세일즈 논리로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숱하게 공들이며 하늘같이 믿고 기대했던 곳이 감감 냉골이기 십상이고 뜻밖에 찾아드는 행운도 있어 세상은 엇박자 투성이었다.
해마다 봄 가을 두번씩은 어김없이 본사 커머셜 매니저가 한국을 찾아와 보통 3일 정도 필자와 함께 20여개 이상의 거래처 선사를 도는 빡빡한 스케줄로 빈틈없이 체크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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