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21 16:42
KSG에세이/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33)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33)
2001년부터 두 임기 6년에 1년을 더해 7년간에 걸쳐 한국선주협회 사무국의 수장으로 사실상 외항해운업계의 제반 실무행정을 책임지는 입장에 있는 박찬재전무는 우선 듬직한 외모에 걸맞게 대형선 캡틴(선장) 출신의 경력을 살려 육해상을 두루 아우르며 해양계의 넓은 인맥을 십분 활용하여 국제통 정해용상무와 함께 복잡한 안팎 살림을 대과 없이 무난히 꾸려나갔다.
필자와 현직 해무 부서에서 함께 일할 때만 해도 때로는 과묵하면서도 소신있는 추진력을 발휘했고 윗 사람 대하는 에티켓이 철저해서 짝퉁 해기사인 필자에게도 진품예우를 하는 직장인으로서 위계질서 준수정신이 철저했었다. 관계와 업계 및 학계에 한국해대 동기와 동창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서 업무추진 과정에서 흔히 발생하기 쉬운 소모성 마찰이나 알력을 최소화하는 실력을 보이기에도 적임자로서 평가받았다.
이들 성과는 2001년 중의 획기적인 정책변화로 최초로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개정법률(법률 제6643호, 12. 30)의 개정을 들 수 있다. 이는 이듬해 4월1일 제주선박등록특구제도 법률의 발효로 이어지고 그 해 6월부터 부과되는 지방세 부터 선사들은 국제선박으로서 제주도에 치적하는 선박은 약간의 등록세만 부과하고 모든 지방세를 실질적으로 감면받아 연간 200억원 이상의 절세효과로 이어지게 된다.
朴燦在전무 濟洲 선박등록特區 입법화로 업계宿願 해결
또 선박확보를 위한 유일한 정책자금, 한국은행의 외화대출이나 계획조선자금이 유명무실화 되어 선사별로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활용하거나 외국계 자금을 이용하여 국적취득조건부 나용선(BBCHP 및 BBC)을 하기가 힘들었으나 우선 외국인에게만 대출해 주던 수출입은행의 선박건조자금을 2003년부터는 국적선사에서도 이용가능케 조치했다.
한편 노르웨이의 KS 펀드나 독일의 KG 펀드가 유용한 선박확보 재원으로 활용되는 예를 본받아 선박투자회사를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여 이듬해 5월 선박회사 투자법을 태동시키는 기초를 마련했고 일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확보하여 선박을 건조한 후 해운선사에 장기 대선하여 운항하고 그 수익을 투자자들에게 배당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한국해운은 아주 모범적인 노사협의 관행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있긴 했지만 부분적으로 해운계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간단없이 대두되고 있는 해상직원의 자질저하와 높은 이직률 및 구인난 문제와 함께 선원비의 국제경쟁력 상실은 해운발전을 가로막는 어려운 과제로 난공불락의 장벽이 되어왔다.
외항상선 선원政策協議會 정착화로 해상인력 收給難 완화
박찬재전무는 90년대 해무부장 시절부터 외항상선 선원정책협의회라는 공식기구를 전국선원노동조합연맹과 한국선주협회간에 설치하여 각종 선원 노사문제와 정책현안을 협의 실현하는 중심축에서 일해 왔다. 90년대에 필자와 함께 노조 대표들과 같이 만리장성과 백두산을 함께 올라 노사간의 스킨십을 돈독히 다지던 기억도 생생히 남아있다.
이에 더하여 일본과 한일 해무위원회를 정례화 하여 번갈아 가며 개최하고 상호 의견교환으로 도움을 나누기도 했다.
그래서 이 때에 모색한 여러 정책 중의 하나가 한국선원을 필요로 하는 ‘필요최소’ 범위를 정하고 또 척당 백만달러에 육박하는 선원비 부담을 해소하고 수급난도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 선원을 일정수 고용해야 한다는 핵심적인 방안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국 해기사의 해기전승과 해기인력의 유지 보전에 필요한 필수선대의 개념을 국제선박법 입법시에 함께 추진하여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제도를 입법화 하게 되었다.
즉 우리나라의 경제 및 국방을 위해 필요한 선대는 한국선원을 승선시켜 선원인력의 직역(職域)을 보장하고 나머지 선박에 대해서는 외국선원 고용을 자유화하여 선원비의 국제경쟁력을 유지하면서 국가가 국가경영에 필수적인 한국 상선대(National Minimum)를 유지하는 방안을 노사정 합의로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이들 필수선박에는 한국선원을 의무적으로 고용함으로써 발생되는 필수선대와 편의 치적선과의 임금 차이는 정부에서 보전하며 필수선박은 유사시 국가가 부여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를 정착시켰고 해기사 산업기능요원제도 및 병역특례제도 역시 원만히 해결되는 놀라운 성과도 얻게 되었다.
한편 해양수산부는 3월에 취임한 정우택 제7대 장관에 이어 9월엔 제8대 유삼남 장관이 뒤를 이었다.
영종도의 인천 국제공항이 문을 열고 쌍용중공업이 STX로 이름을 바꿨으며 11월에는 우리나라가 대망의 ‘IMO(국제해사기구) 카테고리 A’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여전히 발전된 한국해운의 국제적 지위를 견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또 2001년 지구촌 소식으로는 1월 들어 미국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게 되고 3월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했으며 9월엔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붕괴되는 끔찍한 9.11 테러사건이 발생하여 지구촌을 경악케 했으며 11월에는 무역신흥 중국의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확정을 들 수 있겠다.
필자의 새 직장 D마린은 저돌적으로 거래처를 파고들며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펴서 아주 안정적이고도 알차게 운영되었다. 실속있는 재투자로 사업분야를 에스컬레이션 시키면서도 투명 궤도를 달려 신예 다크호스로 군산에서는 화제가 되고 각광받기 시작했다.
美 부시 行政府 출범, 9.11테러事件, 日 고이즈미 내각 출범
일감 따오는 상담 현장을 낱낱이 동석하지 않아도 J사장은 집요하게 파고 들어 설득력 있는 격파로 파이널 위너가 되는 비법은 대단했다. 필자의 부담을 덜게 되어 전보다 편안하고 홀가분해 마음과 시간의 여유 속에 한해를 마감했다.
2002년으로 접어들자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제17회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의 해를 맞아 새해 벽두부터 온 나라가 온통 축제 무드에 들떠 시끌벅적했다. 때 맞춰 어느날 전년도에 재미삼아 지원했던 월드컵 공식 자원봉사자 합격통지서가 날아 들었다. 같이 하자고 끌어 들였던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비롯하여 아침운동 등 무슨 일이고 그림자처럼 함께하는 평생동지인 대학친구 K군도 합격소식을 알려왔다. 여하튼 당시는 무슨 벼슬이라도 한 듯 기분이 좋아 으쓱했다.
전국에서 뽑은 총 봉사인원은 1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고 그중 조직위가 필요로 하는 외국어 구사능력을 갖추거나 분야별 전문기능을 보유하여 별도 엄선된 “공식 자원봉사자(Official Voluntieer)”는 2만명 정도였다. 1만명은 조직위원회 요원으로, 나머지 1만명은 서울 상암동의 메인스타디움을 비롯한 부산, 인천, 울산, 대구, 수원, 광주, 전주, 제주와 대전 등 전국 10개 경기장에 배치되었다. 공동개최를 하게 된 일본도 10개 경기장이 일제히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차례에 걸친 합동 집체교육을 거친 뒤 공중파 M방송국 출신의 L국장과 활자매체 출신 필자가 미디어 분야를 총괄하는 양대 팀장으로 임명되었다. 월드컵 개최기간 중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상암경기장에서의 통신사와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등 수백명이 넘는 출입기자들의 취재를 안내하고 도와주는 미디어 총책이란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것이었다.
D마린업무 외에 월드컵 自願奉仕 미디어총책으로 활약
6개월간 주 1회정도 소집되어 필요한 교육과 더불어 경기장내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수백개의 기자석 설치와 송수신 시스템의 가설 및 점검을 하느라고 매번 비지땀을 흘렸다. 자원봉사자들의 일당은 교통비와 중식대를 합해 하루에 1만원씩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가끔 밤 늦게 일을 끝내고 버스가 끊기면 택시비는 자기부담으로 충당했다.
남궁진 문광부장관, 정몽준 축구협회장·FIFA부회장 겸 조직위원장, 차범근과 펠레, 베켄바우어, 에우제비오와 지단과 앙리를 볼 수있는 절호의 기회가 됐고 무엇보다 88올림픽에 이어 월드컵을 통해 한국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한층 더 높일수 있는 인류의 최대 스포츠축제 현장에서 그것도 미디어 총책으로 진행을 돕는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드디어 김대중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2002년 5월31일 오후 8시30분. 상암경기장에서 프랑스와 세네갈의 첫 경기를 스타트로 개막전의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세네갈이 1대0으로 이기자 순간 지구촌은 천지개벽이라도 된 듯 떠들썩했고 전 세계의 매스컴들은 월드컵 개막전의 대 이변을 알리는 대대적인 보도로 통신 방송 신문들은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 당일밤 무슨 내용의 기사를 그리도 많이 송고하는지 경기 후에도 자정이 넘도록 몇몇의 특파 외신 취재 기자들의 노트북은 타전을 멈출 줄 몰랐고 이튿날 아침 우리나라의 방송과 신문들도 축구얘기로 도배를 했고 역시 스포츠 게임의 빅 이벤트는 매스컴들의 잔치요 신문 방송이 선정적으로 주도한다는 인식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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