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2-02 17:31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26)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26)
1996년 8월 들어 이부식 청장을 마지막으로 76년 3월13일 강창성 초대 청장을 맞아 출범했던 해운항만청은 20년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종언을 고한 후 역사 속으로 묻히고 7선의 국회 부의장 출신으로 퇴임 후에는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를 지내기도 한 신상우 의원을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맞고 곧 이어 조성빈 치안정감을 초대 청장으로 선임, 해양경찰청도 개청 현판식을 가졌다.
97년 선주협회 정기총회에서는 꼭 1년이 되던 날 1월30일에 전년도 회장을 맡은 박재익 회장이 건강문제로 직무수행이 불가능해져 부회장직을 수행해오던 한진해운 조수호 사장을 제20대 회장으로 선출하게 된다. 부회장으로는 조양상선 박재우 사장, 범양상선 유병무 사장, 대한해운 장학세 사장, 한국특수선 장두찬 사장을 뽑았다.
海洋部 초대 辛相佑장관, 船脇 20代회장에 韓進 조수호사장
이사직도 거양해운 이광희 사장, 동남아해운 양길용 사장, 두양상선 조동현 사장, SK해운 이승권 사장, 태영상선 박영안 사장 등 창업 2세들이나 신예 전문 경영인들이 대거 진출하여 선주협회 즉 한국 외항해운업계의 리더들이 젊은 층으로 옮겨갔고 감사로는 동진상선의 이양희 사장과 부관훼리의 박종 사장을 뽑았다. 사무국의 조직과 업무분장도 시류를 따라 업무팀 해무팀 국제팀 총무팀 등 새로운 스킴의 팀장 중심제로 탈바꿈을 하고 비교적 무풍지대인 부산도 이에 발 맞춰 지구협의회를 활성화 시킨답시고 필자 나름대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오래 전부터 업계의 숙원이던 선박도입 관세가 97년부터 전면 철폐되고 부산항 인천항에 대해 지정하역회사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고 전년도 9월 신성해운에 이어 선우상선 등 해기사 출신 CEO들이 이끄는 선사들의 설립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한편 해운산업개발원(KMI)은 ‘해양수산개발원’ 이란 이름으로 개편되어 그해 8월 조정제 원장은 제2대 해수부장관으로 발탁되고 해양연구원과 초대장관 자문관을 거쳐 뒤에 해양수산부 차관과 퇴임후 인하대학 총장을 지낸 홍승용 부원장이 원장 직에 오르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도 국제선박등록제를 조기 도입해야 한다는 업계의 비등하는 여론을 수렴하여 선주협회가 이를 건의하여 8월22일 국제선박등록법을 제정 공포하자 재산세, 지방세의 50% 감면효과를 보게 되고 2002년도에 제주특구를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 해수부와 협회는 해양오염과 환경관리문제가 국가적 차원을 넘어 세계적 관심사와 글로벌 문제로 잇슈화 되자 6월 들어 해양오명방제조합 설립을 위한 추진기획단 운영회의를 본격적으로 가동, 오염방지 관계법령 보완책을 마련하고 11월18일 해양오염방지법 시행령이 공포되자 그간 선주협회가 운영해오던 해양오염방지센타의 해산을 결의,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지금의 해양환경관리공단 전신인 ‘해양오염방제조합’을 출범시키고 이차환 중앙해난심판원장을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하여 새로운 조직으로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해무부장 시절 정부의 권유에 따라 최초로 효시의 밀알을 뿌려 탄생의 탯줄을 잘랐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밖에도 9월에 인천항 종합여객시설을 착공하고 11월엔 가덕 신항만개발공사가 기공식을 했고 12월 들어서는 광양 1단계 컨테이너부두 준공식을 가졌으며 12월16일에는 해양문화재단을 설립,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이사장을 맡아 현판식을 갖는 등 해운계 움직임이 비교적 활발했던 한 해로 기록된다.
해양오염방제조합·해사문화재단 출범, 가덕 신항만 기공식
그러나 국적선사 운임 수입이 최초로 100억달러를 넘어서고 8천여명의 해외취업 선원이 3억6천만달러의 외화를 버는 기록을 세우긴 했으나 계속되는 해상물동량의 둔화와 시황의 침체 및 원화 환률의 폭등에 따른 환차손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던 해운업계도 드디어 IMF체제(국제통화기금)가 경제나 산업계 전반에 걸쳐 확산되자 자본과 금융비용 및 외채가 높은 업종의 특성상 유달리 큰 난관을 맞게된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나 보고 듣던 IMF란 말보다 실제 이 체제 관리하의 해운은 엄청난 파고를 더했다.
당초 2000년까지 확보할 계획이던 200척의 선박과 추정 소요자금 100억달러 조달은 신규차입은 고사하고 이미 체결한 선박금융의 차입조차 제동이 걸렸다. 한보철강의 몰락 등 대기업들의 잇따른 부도사태는 주가폭락으로 이어졌고 금융기관의 부실을 불러서 바로 외환부족을 초래했으며 급기야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통한 수혈이 불가피한 최악의 경우를 맞기에 이르렀다.
금 모으기 운동이 전개되어 돌반지를 내다파는 사태로까지 국가경제가 심각한 위기를 맞는 가운데 더 이상 해운업 면허를 규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해운업법을 개정하여 해상운송사업 면허를 자율화하자 새로 출범하는 선사도 늘었고 사정이 어렵던 한라해운이 도산되는 등 해운계의 부침으로 인한 구조적 재편현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釜山地區協 위원장에 木海大출신 東南亞 이영윤常務 선임
부산지부는 임기가 끝난 박을생 위원장(고려해운 상무, 한국해대 11기) 후임으로 동남아해운 이영윤 상무이사(목포해대 14기)를 새로운 부산지구협의회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부산 해항청장을 초청하여 정기지구협의회를 열어 부산항 컨테이너터미널 하역요율 개선을 비롯한 각종 현안업무 처리에 열을 올렸다. 해무 및 업무분과위는 예도선 중앙운영위의 위임업무의 원활한 해결을 위해 당해 협회와 업체들을 상대로 연일 머리를 맞대고 묘수를 찾지만 늘 그렇듯 생산성이 낮은 협의가 계속되기만 했다.
업무 출장차 가끔 부산에 내려온 박창홍 전무이사는 매번 지부의 직원들 회식은 물론 귀양 보낸 필자에겐 측은지심을 담은 대포 값을 전하며 무언의 위로를 했다. 옛 말에 “가랑잎이 눈을 가리면 태산도 못보고(一葉閉目 不見太山), 콩알이 두 귀를 막으면 우레 소리도 못 듣는다(豆塞兩耳 不聞雷霆)”고 했겠다. 부산에 근무하는 임원의 임기 3년 동안에 전화로나마 업무 협조를 요청해 오거나 안부를 물어오는 동료급이나 손아래 부장급은 한 사람도 없었으니 특과중의 특과가 부산 지부장이었고 오가는 문서나 소문에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는 한 마음만 먹으면 격리된 소왕국(?)이 되어 독립만세를 부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97년 IMF체제 돌입, 救濟金融 신청 해운산업도 큰 타격
자격지심으로서가 아니라 한 조직이 그것도 해운 중심단체의 본부와 제1항만 메인포트에 자리한 유일한 하부 조직 부산 지부인데도 흔히 얘기하는 활성화된 유기적인 상하 조직으로서의 업무소통과 추진엔 아쉬움이 많았다. 가끔 부산에 출장온 회원사 임원들이 부산지부를 찾아주거나 부산에 본사가 있는 한일선사 사장들로부터 직원들과 함께 식사라도 대접받으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또 업종상 갑과 을의 관계라 할 수 있기는 해도 관련 단체에서 가끔 베푸는 온정에는 꼭 먹어서 맛이 아니라 하루 중 해질녘이 가장 쓸쓸하다는 지방근무 홀아비에겐 마음의 상처를 달래주는 큰 위로였다.
그리고 해운계 회식이나 행사가 선주협회 부산지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탓에 단골 식당 등 거래처에서는 혼자 내려와 홀아비로 지내는 필자에겐 특별히 온정을 베풀고 서빙하는 ‘아지매’들도 주말이나 쉬는 날엔 여러가지로 봉사를 아끼지 않아 지금 돌이켜 봐도 그리운 얼굴에 고마운 그 분들께는 안부와 더불어 사례라도 하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대학의 같은 과 친구이자 부산 출신으로 지금도 평생동지로 지내는 당시 금융 보험계의 현지 책임자 J 및 K 친구와는 퇴근 후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였고 언젠가 서울에 안가는 주일에 우연히도 초파일 방생행사를 겸한 묻지마 관광(?)을 따라 갔겠다.
남자 단 둘이 40명 이상의 부산 아지매들을 상대로 대결, 마시고 춤추며 십수시간을 무릎이 까지고 멍들게 버스통로에서 마이크를 잡고 논스톱으로 뛰고 놀았던 추억은 누가 뭐래도 50대 중반 필자의 돌이킬 수 없는 열정이었고 지금도 에너지 넘치던 그 때를 회상하며 가끔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그 시절이 클로즈업 된다.
또 한번은 주말 J지점장과 교외로 바람을 쐬러 간다는 게 차로를 잘 못 들어 내친 김에 무작정 달린 길이 끝내는 거제도와 해금강을 거쳐 다다른 곳 바로 한국의 ‘판타직 아일랜드(환상의 섬)’ 외도였고 아직도 그 섬이 인연이 되어 맺게 된 사연과 묻어둔 추억은 외롭거나 힘들 때 가난한 영혼을 달래주는 전설이 되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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