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나흘 만이다. 19일 밤 자정 민관군 합동구조팀이 선체 유리창을 깨고 진입에 성공, 3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선내에 직접 진입해 성공한 첫 수습이다. 사망자는 모두 단원고 남학생 세 명으로 밝혀졌다. 희생자들은 목포 중앙병원과 기독병원에 안치됐다. 선내 진입 전 발견된 33명을 포함해 사망자는 36명으로 늘어났다. 실종자 266명을 합하면 전체 희생자는 302명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시신을 맨 먼저 발견한 사람이 누군지를 두고 잡음이 일었다. 주인공은 민간 잠수사였음에도 언딘의 성과로 발표됐고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뒤늦게 언딘에서 이를 시인해 빈축을 샀다.
해경은 민관군 잠수부 500여 명을 총 40차례에 걸쳐 투입하고, 함정 170여 척과 항공기 30여 대를 이용해 선체 주위 해역을 집중 수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사고해역은 육해공으로 분주하기만 하고 혼란스러울 뿐 정작 잠수하는 인원은 많지 않았다.
잠수가 가능한 정조기(조류가 멈춘 시기)가 하루에 네 번 찾아왔지만 한 번의 정조시간은 30여 분에 불과했다. 모두 합해도 하루 두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매 정조마다 2인 1조 기준 6명의 요원이 잠수를 벌였다. 하루로 따져봐야 스무 명 남짓이었다. 장비와 잠수사 안전 문제로 더 늘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숫자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가족들은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냈다.
“대통령을 연결해 달라. 이러다가 우리 애들 다 죽이겠다.”
가족들은 재난대책의 총책임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사고 현장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 행태에 더욱 분통이 터졌다.
“청와대로 가자.”
고함소리를 내며 진도체육관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나왔을 때 대절한 버스 대신 경찰버스 10대가 늘어서 있었다. 경찰병력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부관계자는 애원했다.
“총리를 모셔올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새벽의 현장상황은 아수라장이었다. 해경청장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구조가 힘들다. 죄송하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중에 총리가 왔다. 학부모 대표가 항의했다.
“길을 막는 이유가 뭡니까, 우린 폭력시위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거짓말하는 정부를 믿지 못해 청와대로 가려는 겁니다. 시체만이라도 온전하게 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구호물품에 핫팩이 포함돼 있는데 차디찬 바닷물에서 저체온증으로 애들이 죽어가고 있어요. 애들에게 핫팩을….”
말하다가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사고 엿새째인 21일 자정 무렵 시신 한 구가 들어왔다. 첫 박수가 터졌다. 생환이 아니라 시신으로 돌아왔는데도. 안내방송이 나왔다.
“75번입니다. 검정색 남방에 바지는 회색 운동복. 키가 168센티 아주 큽니다. 긴 생머리. 이마와 오른쪽 광대에 여드름, 왼쪽 목 뒤에 점이 있고요. 특징은 치열이 고르지 않습니다.”
“볼 오른쪽에 점이 있나요?”
한 어머니가 손을 들고 시신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아이예요. 우리 아이 맞아요.”
어머니는 안도했다. 주위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부러움을 샀다. 마치 살아온 아이처럼 기뻤다.
한 실종자 어머니는 “우리 애도 빨리 찾아야 하는데. 한번이라도 안아줘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희망의 끈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는 실종자 가족들이 늘어났다.
“대통령이 포기하고, 총리가 외면하는데 구조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소리를 질렀다.
한편 안내방송은 계속됐다. “여자는 오른쪽, 남자는 왼쪽입니다. 확인하세요.”
수사관의 지시대로 실종자 가족들이 움직였다. 시신이 안치된 천막으로 몰려갔다. 어머니들은 부축을 받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울부짖고, 통곡하고, 가슴치고, 숨이 넘어가고…. 가족이 울고, 의사가 울고, 경찰도 울었다.
서정민은 살아남은 죄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이날 늦게 서울 집에 들렀다가 돌아온 이팔봉 회장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서로가 젖은 눈으로 마주보았다.
“서 사장, 순정이한테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루 이틀 더 기다려보시죠. 기적이라는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서정민은 실종자의 생환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이 회장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고 싶었다. 노인의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기적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겠지, 응?” 그리고 무엇이 갑자기 생각난 듯 서 사장의 팔을 잡고 말을 이었다.
“자네 아이들에겐 알렸는가?”
“체육관에 도착했을 때 전화했습니다. 당분간 진도에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네 부인한테는?”
“배 탄 거 자체를 모릅니다. 이미 별거 중인 여자한테 알릴 필요도 없었고요.”
서정민이 체육관으로 돌아오자 실내는 난민수용소 같았다.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다. 시신을 찾은 가족들이 떠난 자리다. 밖에는 전국에서 보내온 구호물품이 가득 쌓여 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수색작업의 중계 화면과 뉴스를 보느라 뜬눈으로 밤을 새웠기 때문이다.
체육관 바닥 한구석에서 수학여행 간 오빠를 기다리는 초등학생이 아빠를 안고 뽀뽀하고, 엄마 손을 꼭 잡고 애교를 부린다. 서정민은 이 광경을 보았다.
이순애의 딸이 이 자리에 있어도 할아버지와 태연하게 장난치고 있었을까. 그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사고 후 일주일이 지나자 진도 팽목항은 실종자 가족, 기자, 가족보다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로 붐볐다. 현장 분위기도 살아 돌아오리라는 희망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팽목항 가족대책본부 앞에 사망자 현황판이 들어섰다. 쪽잠을 자다 깬 가족들이 몰려든다. 오열이 터진다.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들을 확인하려고 임시 안치소로 간다.
남겨진 가족들은 팽목항에 설치한 조립식주택이나 천막으로 돌아가거나 항구에서 바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우리 애가 저쪽에서 배를 타고 올 거예요.” 물끄러미 바다만 바라보던 젊은 엄마는 망부석처럼 미동도 없다. 끝내 바다에 대고 울부짖었고 금방 실신했다.
국가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은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고 하고, 안전행정부는 ‘해난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해수부와 해경과 해군은 눈치 보기 바쁘다. 울부짖는 가족들을 피해 도망가고 책임을 미루는 사이, 구조는 지체되고 갈등은 커져만 간다.
갈등은 바닷속에서도 일어났다. 잠수사들이 장비 사용료와 인건비 등의 이권을 놓고 다투곤 했다.
“잠수사가 750명이나 된다더니 실제 잠수하는 사람은 13명뿐이라니 말이 되냐?”
가족들의 속은 타들어만 갔다. 임시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은 유경근 씨는 단원고 예은이의 아빠다. 그는 딸의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다면 구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일주일 만에 건져 올린 아이들 중에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손가락이 골절된 유해가 많았다. 죽을 때까지 얼마나 괴로웠을까.
수습한 시신의 숫자가 늘어났다. 싸늘히 식은 조카의 시신을 안고서 “그래도 찾아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삼촌이 있었다.
유경근 씨도 열흘 만에 딸의 시신을 찾았다. 쌍둥이 언니가 “그동안 못되게 군 게 미안하다”며 꼭 데리고 와달라고 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시신 인도절차가 간소화됐다. 수사검사와 검안의사를 충분이 배치하고 간이영안실을 설치해 실종자 신원 확인만으로도 시신 인도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틀 정도 걸리는 DNA 검사결과를 기다릴 경우 시신훼손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군수송기로 시신을 인도하고 장례비는 정부가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팽목항에선 화장실 가는 게 그렇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 소리 죽여 우는 가족이 많았기 때문이다. 비상사태는 권력의 무능과 제도의 무용론을 폭로한다.
시민들은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주고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도 말이다.
<이 작품은 세월호 사고의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한 창작물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업 지명 등은 실제와 관련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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