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조선시장을 호령하던 국내 조선 ‘빅5’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1980~1990년대 중공업 위주의 정책 효과에 힘입어 고속성장을 거듭한 국내 조선업은 지난 2000년 세계 1위에 등극한 이후 신기술 개발 및 설계능력까지 확보해 십수년간 전 세계 조선시장을 선점해왔다. 가장 큰 경쟁 상대였던 일본을 제치고 이끌어낸 쾌거라 국내 조선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업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국내 조선업이 최근 전 세계 경기침체와 중국이라는 변수로 인해 그 영광의 시절을 서서히 접고 있어 큰 걱정을 안겨주고 있다. 영국 클락슨은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 조선소별 수주잔량 순위를 발표했다.
1~2위는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3~4위에는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현대삼호중공업이 각각 차지해 한국 기업의 독식은 그대로 진행됐지만 그동안 세계 5위의 자리를 차지하던 현대미포조선이 중국 상하이 와이가오차오조선소(SWS)에 밀려 6위로 순위가 한 계단 내려앉았다. 이어 세계 7~8위도 장수뉴양즈장타이저우조선소와 후동중화 상하이조선소가 차지해 중국 조선업은 무서운 성장세로 한국 ‘빅5’를 위협하고 있다.
물론 이는 각 조선사별 수주잔량을 나타낸 수치로 해당 기업들간 의견은 분분하다. 특히 줄곧 5위를 지키던 현대미포조선이 6위로 내려간 것에 대해 해석이 엇갈렸다. 현대미포조선은 올해 원활한 선박건조의 결과로 예상 목표치인 80여척의 선박을 선주사에 인도해 수주잔량이 대폭 줄어든 반면, SWS는 올해 303만CGT(78척·수정환산톤수)을 수주했지만 공기 내 선박 인도가 늦어져 결국 수주잔량이 늘며 이번 순위가 역전 된 것으로 추정되기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과거 세계 ‘톱10’에 한국 조선사가 무려 8개가 포진돼 세계 조선시장을 이끈지 불과 몇 년 만에, 국내 중대형 조선사인 STX조선해양, 성동조선해양, SPP조선의 경영위기를 틈타 이제는 3곳의 중국 조선사와 2곳의 일본 조선소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국내 조선업은 중소 조선소가 먼저 위기를 맞았다. 최근 27곳에 달하던 중소 조선소는 현재 약 10개사 정도만이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日 조선업, 엔저정책으로 활기
최근 일본 조선소들도 중국에 이어 국내 조선사들을 위협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조선소들은 거의 생명이 다했다고 할 만큼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국 정부의 엔저정책을 무기로 한 해외수주와 해운선사들의 잇따른 발주로 연일 수주잔량이 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수주잔량 부문에서 세계 9~10위를 차지한 이마바리 SB 마루가메(47척, 189만CGT)와 아마바리 SB(93척, 163만1천CGT)를 비롯한 일본 조선소들의 행보가 거세다.
지난해 국가별 수주실적 집계 결과를 보면 국내 조선사가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3380만CGT로 중국이 30.3%인 1025만CGT, 한국은 30%인 1015만CGT를 차지해 중국이 한국을 10만CGT 차이로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일본은 27.1%인 914만CGT로 3위를 차지했는데 한국과 불과 101만CGT 차이였다.
중국은 2012년 이후 4년 연속 수주실적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중국 전체 발주량 중 45%(455만CGT)를 중국 선주가 발주했다는 점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국내 선주가 발주하는 물량이 전체 수주량의 약 5%가 안 되는 실정으로 거의 대부분을 해외 발주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해외 선주들의 발주에 목말라 덜컥 수주한 선박이 기술력의 부재, 덤핑 수주, 선박 인도일 지연 등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지난해 8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적자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한 때는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일컬어지던 해양플랜트가 이제는 조선소의 발목을 잡는 대표적인 수주 사례로 꼽힌다.
고부가가치 선박수주로 돌파구 마련해야
이런 암울한 수치와는 달리 한국 조선사에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선박 수주실적은 중국에 뒤지고 있으나 수주 금액에서 우리나라는 선박 262척을 수주하며 218억4800만달러를, 중국은 452척으로 188억8900만달러, 일본은 362척으로 128억5300만 달러를 달성, 한국이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벌크선, 유조선 등 저가 선박 발주에 강점을 보인 반면 한국은 초대형 컨테이너선, 대형 유조선, 해양플랜트 등 고부가가치 선박군을 중심으로 수주하며 이 같은 격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격차도 머지않아 크게 좁혀질 전망이다. 최근 중국 내 자국 원양선사의 초대형 컨테이너선 및 해양플랜트 설비를 이제는 한국이 아닌 중국 조선소로 일감을 몰아주고 있기에 한국 조선소들은 현재의 수주 환경에서 탈피해 특단의 대책 마련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고부가가치 선박의 집중 수주가 유일한 해결책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최근 환경문제로 각광을 받고 있는 LNG연료유 선박 등과 같은 에코십 등 충분한 기술과 경험을 토대로 만들 수 있는 선박 건조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또 선사에 대한 정부 당국의 정책적인 배려도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는 해운업은 뒷전인 채 제조업인 조선업에만 치중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조선소가 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반면 선사는 고용인원이 상대적으로 적고 관련 기업이 다수 존재하기에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수출입 화물의 약 99%를 선박으로 운송하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에서 만약 자국 선대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우리나라와 달리 중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주요 국가들은 예전부터 자국 선박회사 및 조선소 육성·지원책에 힘입어 막대한 자금투자와 금융혜택 등을 실현하고 있다. 현재 우리와 가장 큰 경쟁관계인 중국·일본정부는 자국 선사인 차이나쉬핑, 코스코, 시노트란스, NYK, 케이라인 등에 정책자금지원을 통해 자국 조선소에 선박 발주를 적극 유도해 동반상생 및 성장을 실현하고 있다. 이처럼 선사와 조선사를 연계한 정책을 기조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다수의 국내 선사들은 현위기 극복에 필요한 정부의 정책지원을 기대하긴 힘든 실정이다.
만약 현 상황에서 국적 원양선사가 살아남지 못한다면 결국 국내 조선소들은 해외 조선소들에 비해 안정된 물량 확보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과당경쟁, 저가수주, 부실가중으로 이어질 공산이 매우 높은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난 한 해 한국 조선소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같던 해양플랜트 분야에서 똑같은 과오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대부분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설계기술을 국산화 하는 게 시급하며 각종 조선 기자재의 국산화 및 생산 공정의 효율성 극대화가 반드시 확보돼야 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 부산=김진우 기자 jwkim@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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