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과 을(乙)의 얘기가 그치지 않는다. 모두 갑돌이와 을순이 얘기 때문에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귀에 익었다. 갑·자·을·축… 육십갑자 때문에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눈에 익었다. 요즘 들어서는 한 맺힌 을의 하소연과 태산처럼 버티는 갑의 위용 때문에 갑과 을은 더욱 익숙해졌다. 횡포를 부리는 ‘갑’에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 한 채 속병을 앓는 ‘을’이라는 전근대적 ‘갑을 관계’는 이제 확실하게 청산해야 할 때가 됐다.
갑을 관계는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있는 일이다. 공직사회에도 마찬가지다. 중앙부처와 지방정부, 지방정부 내에서도 도청과 시·군 관계는 명확한 갑을 관계로 움직인다.
그런데 그에 속한 자들이 밖에서 모두 갑이 되어 행세한다. 그곳을 떠나는 순간 내가 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텐데 잠시 무엇에 씌어서 사는 탓인지 막무가내로 기세가 등등하다.
그들이 잠시 몸담고 있는 갑의 내부는 어떨까. 그 속에서는 다시 수많은 갑과 을의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힘 있는 곳일수록, 돈 많은 곳일수록, 인기 높은 곳일수록, 두 눈에 피눈물을 흘리고 전신에 피멍이 든 속사정들이 끝없이 들려온다.
갑을과 무관해야 할 가정(家庭)은 어떤가. 집이야말로 갑을이 없는 무풍지대인가. 오히려 집집마다 갑과 을의 힘겨루기로 날이 새고 날이 진다. 예전에는 대부분 시댁 가족들과 갑을 시비가 잦았는데 요즘은 갑을 전선이 전(全)방위로 확산되었다. 크는 을(자식)때문에 갑이라고 여겼던 부모들의 한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신혼 초부터 갑의 지위를 선점하려다가 결혼 생활 일 년도 되지 않아 원수처럼 헤어지는 커플이 수도 없다. 놀랍게도 20년, 30년을 부부로 살고도 갑과 을의 위치가 불안정해서 기어이 갈라서고야 마는 중·노년의 부부도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다. 이렇듯 갑을 의식과 갑을 관행에서 비롯된 마찰과 갈등은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안 결코 피할 수 없는 아픔이다.
그렇다면 갑과 을의 관계는 모든 개인 대 개인, 기관 대 기관, 조직 대 조직 사이에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인가. 오히려 그 이상이다. 인간 내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갑과 을은 내 안에 얽히고설킨 풀어지지 않는 끈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굴곡과 상처이다.
거절당한 분노가 있고,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 때문에 원망과 좌절이 있다. 틈만 나면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마치 요철과 같은 불안정한 내면세계가 도사리고 있고, 기회가 닿기만 하면 나를 드러내고 내세우고 입증하고 과시하고픈 여리고 여린 자아가 있다. 어쩌겠는가. 너나 할 것이 없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그런 입장에 처하지 않아서 갑의 행세를 못할 뿐이고, 내게 그런 일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지 않아서 을의 서글픔에서 비켜서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갑이 되고픈 욕망과 언제나 을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따지고 보면 갑을 관계가 사라진 삶의 모델이 시대를 초월해 추구해 왔던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단순히 갑과 을이 뒤바뀌는 혁명이 아니고 그렇다고 안정을 이유로 고착된 갑과 을의 질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 대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갈증이 가장 타는 목마름인 까닭이다.
사실 갑을관계는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한국 사회는 “노예 관계”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유난히 더 심한 것일까? 조선시대 관존민비에 뿌리를 둔 갑을관계는 해방 이후 ‘전관예우’, ‘브로커’라는 사생아를 낳았고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을 ‘전관예우 공화국’, ‘브로커 공화국’, ‘선물의, 선물에 의한, 선물을 위한’ 나라로 탄생시켰다.
반대로 ‘을의 반란’이 표출된 것이 시위와 데모였다. ‘을의 반란’이 ‘증오의 종언’을 향해 나아가는 걸 전제로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시대정신일 것이다.
갑을관계가 지속되는 건 을(乙)뿐만 아니라 갑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밖에 없음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정의와 도덕이라는 관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익을 나누는 성장과 혁신차원에서도 갑을관계는 타파해야 할 때다.
경제적 강자가 힘의 논리로 약자를 짓밟고 억압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나서서 약자를 보호하고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관계를 ‘갑’과 ‘을’로 양분하기도 힘들뿐더러 그 관계의 어느 한편은 ‘악(惡)’, 다른 한편은 ‘선(善)’이라는 도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한국 사회가 온통 분노와 적개심에 가득 차 있는 까닭도 이분법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요즘 기존의 여당, 야당과는 다른 새로운 당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가 큰 이유도 ‘네 편-내 편’,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강요로부터 이젠 제발 좀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찌 좌파-우파만 있겠는가. 위파-아래파도 있고, 앞파-뒤파도 있다. 세상은 그만큼 중층적이고 다양하다.
정치권이 ‘갑은 혼내고 을은 보호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 바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은 ‘갑’과 ‘을’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병(丙)’과 ‘정(丁)’도 함께 사는 세상이다.
갑과 을의 강자와 약자는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갑을 관계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관존민비 사상에서 비롯됐다. 갑을 관계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이는 공정한 시장경쟁과 조세정의, 그리고 분배를 통해 바로잡아야 한다. 물론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회에서 갑과 을을 무 자르듯이 갈라 처벌하고 규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법과 제도만으로도 뒤틀린 갑을문화를 풀지 못한다. 수직적 갑을 관계를 수평적 동반자 관계로 바꾸는 노력이 절실하다.
위 칼럼 내용은 당사의 견해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코리아쉬핑가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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