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5 12:30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9)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9)
드디어 무한대 더 넓은 바다로의 본격적인 항해가 시작됐다.
밤낮 열흘이니 스무날을 넘게 맑은 날 흐린 날 가리잖고 기관실 엔진소리가 찰라의 멈춤도 없이 물과 바다와 하늘만 바라보며 그리고 가끔은 높은 파도와 험한 너울과 칠흑 황천에 더하여 롤링과 피칭에 시달리기도 하고 말라카해협도 거치며 적도제도 지내고 아열대 따끈한 태양볕에 일광욕도 즐기며 배 가는대로 인도양을 따라 어디론가 끊임없이 물살만 가르며 계속 항행이다.
그러길 여러날, 마침내 1등항해사가 전하는 복음(?)인즉 교과서에서 배우며 이름만 듣던 버마의 랭군항 (현 미얀마의 양곤항)이 가깝단다. 입항이 코앞에 닿자 200명의 실습생들과 운항교관 및 사관들은 일제히 흰색의 세일러제복 차림의 정장에 갑판 양쪽으로 차렷 자세로 도열을 하고 황금빛 찬란한 브라스밴드 악대는 행진곡조의 멋지고 신나는 경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열렬히 환영하는 랭군 시민들과 학생 어린이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필자로선 상상도 못했던 큰 환영을 받으며 한바다호는 Along Side(접안) 후에 CIQ(제반입국절차)를 거쳐 상륙과 둥시에 경찰당국으로부터 연도의 제차를 정지시키는 경호와 에스콧을 받으며 랭군시가를 일주한 뒤에 독립영웅 아웅산장군 묘지와 쉐다곤 파고다등을 둘러보고 낯선 풍물을 익히기에 정신이 없었다.
저녁시간엔 출국전 계획대로 외인부대원(?) 다른 두명을 데리고 만남은 없었지만 외무부에 근무하는 친구가 주선해준 대학 선배 이계철 버마주재 한국대사를 만나러 대사관저를 방문했다.
초면이지만 낯선 곳에서의 만남이라 대사관 참사관들 까지도 함께 아주 반가이 맞아주었고 이어서 이대사가 반가운 사람이 한분 더 올 것이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함박웃음으로 깜짝쇼를 하며 얼굴을 내밀고 나타난 인물은 몇 개월전 이곳에 부임했다는 캠퍼스 절친 ‘영문도 모르는(?) 영문과’동창생 KOTRA의 랭군주재 장소웅 무역관장이 아닌가. 이역만리에서의 극적인 해우였다.
남쪽나라 십자성과 야자수 아래서 늦은 밤의 열대지방 정서를 마음껏 무르녹이며 그때만 해도 엄격한 사회주의 국가라 음주가 힘든 환경에서도 파안대소 밤이 새도록 모두가 거나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담소하며 치외법권(?)을 누리던 추억과 이튿날 우탄트를 배출한 랭군 대학을 방문하여 몇몇 여대생들과 나누던 정담과 썸씽(?)은 영원히 잊지못할 추억이 됐고 무엇보다 이듬해 끔찍한 아웅산 테러 사건때 이계철선배 대사도 비참한 희생을 당했다는 비보는 다른 16명의 고귀한 영령들과 함께 지금까지도 슬픈 기억으로 남는다.
해와 달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먼저 보고 또 가리는게 없어 밤낮을 보면서도 항행중엔 날짜 가는 걸 정확히 모르며 시간은 흘렀다.
바둑은 오목정도니 더 배울 생각도 안했지만 장기는 차포마상에 가는 길 정도는 알아서 본선 견학이 지루하면 자주 항해나 기관과 사관들과 장기두기에 몰두했다. 일취월장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몇 개월짜리 긴 여정의 크루즈를 타고 해상여행을 하다보면 출항시 처음만난 남녀가 사랑을 나누며 정답게 지내다가 마침내 여행이 끝날무렵 귀국시에는 애기를 안고 내린다듯 다시 한번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고 식당개 3년에 라면을 끓이는 현상이 장기판에도 일어나 첨엔 뒷전서 구경만 했으나 어떤 날은 하루에도 수십판을 두게되니 나중에는 드디어 필자가 선내 장기 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됐고 그때 익힌 꼼수가 지금의 장기판에도 통할지는 의문이다.
랭군체재 일정을 끝내고 출항한 한바다호는 다시 밤낮 며칠간의 긴 항행 끝에 고대문명의 발상지로 일컫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거슬러 어느날 새벽녘에 파일럿 스테이션서 도선사를 태운 후 역시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인도의 갠지스강변의 접안 시설에 정박을 했다가 짧은 거리로 쉽팅(轉錨)을 한후 캘커터(지금의 콜카타) 근처로 묘박지를 옮겼던 것으로 기억된다.
힌두교의 성지로 숭배받는 갠지스강의 아침풍경과 첫 인상은 성스럽다기 보다는 진흙탕물의 느린 유속과 강물에 몸을 담그고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들로 뒤범벅이 되어 강물에서 멱을 감는 강수욕장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 물에 쌀을 씻으며 식사준비를 하는 등 상상조차 할수없는 모습이 지금 돌이켜봐도 그래서 오히려 더욱 인상깊고 경이로웠던 것 같다.
마더 테레사가 기거하는 수도원 그리고 한길과 인도를 버젓이 오가는 소떼들과 릭샤나 인력거의 질주하는 거리풍경 하며 노점상에서 산 음식을 흙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맨손으로 뭔가를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30년이 지난 지금 재생이 가능한 기억의 전부고 그뒤 수년후에도 해운회담차 뉴델리를 비롯한 그 쪽 몇 곳을 들렀지만 지저분한 거리하며 황량하게 부는 바람에 휴지조각들이 마구 흩날리던 시가지는 크게 달라진게 없었고 지금의 발전된 BRICs의 하나, IT강국 인도의 참신한 이미지를 가리는 영상으로 오버랩되어 남아있다.
또 일행들과 주점에 들러 취기가 오르자 어차피 배를 탔으니 우리도 마도로스가 돼 보자며 어릴 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귀동냥으로 흥얼대던 ‘나가이 다비찌노 고까이 오에데. 후네가 미나또니 도마루 요루’를 부르며 ‘미나또마찌 주산반지(港町十三番地)’를 흉내내던 생각이 나고 그 인연으로 해서 이는 필자의 몇개 안 되는 엔카(演歌) 애창곡목에 추가되는 계기가 됐다.
라스트 포트! 인도의 캘커터항 반환점을 돌아 이제는 마지막 네번째 기항지 일본의 나가사키를 향해 돌아가는 뱃길의 갑판이다. 밤낮 열나흘이라니 28일간 거의 한달을 지나야 육지를 밟게 된다니 또 한번 아찔했다.
그리고 고국 소식은 깜깜이로되 그 사이에 1982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한가지 궤변을 떨면 여하간 햇수로 2년간(?)이나 배를 타고있는 셈이 됐으니 그래서 지금도 필자가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 있는 바로 그 조자룡의 헌 칼 ‘81년부터 82년까지 승선경력 2년’이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됐고 자가발행 ‘2년간 승선필증’이 아주 근거없거나 허무맹랑한 경력사칭 만은 아닌 결과가 된 것이다.
안 타봤을땐 말을 못했으되 이젠 누가 물어와도 ‘81년부터 82년까지 약 2년’은 확실(?)하니 비록 날수로는 2개월이 못 되지만 이 정도 승선경력이라면 약간의 허풍에 입담 좀 보태 아쉬운대로 해무부장직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승선경력은 쌓은 것으로 치부했다.
당시 선내 통신시설이라곤 베틀북처럼 좌우를 오가며 찍찍 소리를 내는 팩스밀리와 통화때마다 외줄로 오가기 때문에 송수신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아 박자맞춰 번갈아 가며 한마디씩을 주고받은 후 끝내고 나선 어김없이 ‘이상’이나 ‘오버’를 연발해야 하는 SSB(Side Single Band) 시스팀의 전화기 뿐이었고 그마저 유대근 통신장(작고)을 통해 출국 후 한두번 고향 부모와 옆지기에게 안부를 전한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대양에서 항행을 계속하다 보면 주위환경에 변화가 없어 그 날이 그 날 같고 세월이 오는건지 가는건지 도대체 종잡을수 없는 데다가 가끔, 나중엔 자주, 잔잔한 밤바다 유난히 달이라도 밝은 날이나 손에 금세 잡힐 듯 함박 별들이 쏟아지는 밤에는 별자리를 찾아 한국땅이 어디멜까 그려도 보고 5학년짜리 아들녀석과 3학년짜리 여식은 지금쯤 이 아빠를 보고싶다며 밤마다 울어대는게 아닐까도 걱정.
나중에 귀국해서 알았지만 처음 며칠은 보고싶다며 자주 찾다가 일주일쯤 지나니 아빠는 필요없는양 말 한마디도 꺼내지 않더란데 그것도 모르고 입항해서 상륙시마다 예쁜것만 보면 이것 저것 골라서 선물꾸러미를 정성껏 싸고 챙겼던 일이 속으로 겸연쩍게만 여겨졌다.
캘커터 출항 열흘이 넘어도 한바다호의 항해는 멈출 줄을 몰랐다. 너무나 지루하지만 끝날 날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항행의 어느날 다시 바다와 배와 내가 조용히 만났다.
“바다는 언제 잠드는가?”
“이 세상 가장 높은 곳에 바다가 있네”
그때, 2002년 작고한 7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해양시인 김성식선장을 알았더라면 자문을 받아 낙서로나마 글줄이라도 끄적여 모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부질없는 후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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