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26 16:38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25)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25)
96년1월 총회에서는 건강문제로 업무수행이 불가능해진 조상욱 회장의 뒤를 이어 부회장직을 맡아왔던 조양상선 박남규 회장의 장남 박재익 사장을 제19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경남고와 연세대를 나와 재벌 2세로 경영수업을 쌓은 데다가 45년생, 약관 51세의 젊은 회장이라 단번에 해운계는 물론 경제계의 주목을 한눈에 받기에 충분했다.
전임 조상욱 회장은 2월 14일 해기사 출신으로 해운계의 민간 수장에 오른 영예를 마다하고 아깝게 중도 타계했다.
부회장으로는 기존 현대상선 박세용 사장, 한진해운 조수호 사장, 대한해운 송기원 사장, 고려해운 이동혁 사장, 흥아해운 이윤재 사장 외에 한국특수선 장두찬 사장, 범양상선 한기선 사장을 새로이 추가 선임했다. 그간 수 십년간을 총회때 마다 밤을 새고 마음 졸이며 총회준비를 걱정해 왔었으나 이 해부터 시원섭섭하게도 부산지부가 1년간 처리한 업무결과와 부산지구 협의회가 수행한 실적을 정리해서 본부에 보내는 걸로 일단 필자의 준비상황은 끝이었다.
19代회장에 조양 朴載益, KSS 장두찬 興亞 이윤재 새 副會長
강 건너 불 보러 가듯 남의 잔치 구경가듯 하루 전에 올라가 집에서 자고 당일 참석, 특별한 역할이 없으니 행사장 입구에서 차량 유도로 주차를 도우며 기도(木戶)를 서거나 모처럼 회원사 임원들과 얼굴 맞대고 반가이 인사를 나누며 건성으로 반기는 목례나 악수라도 황송한 듯 받아 넘기고 임원석에 앉아 회의진행을 참관 후 점심 회식이나 어울려 하고는 곧장 김포공항을 출발, 김해공항으로 씁쓸히 돌아오는게 고작이었다.
한편 96년 중에는 우리나라 수출입 총 물동량이 전년보다 14.2%나 늘어 4억8,563만톤에 달했고 이중 용선을 포함한국적선 수송량이 2억4,895만 톤으로 51.3%라는 사상 최고의 경이적인 운송실적을 나타냈다. 수송수요에 맞춰 중고선 도입규제도 대폭 완화, 천톤 미만이거나 선령 20년 이상을 제외하고는 전면 자율화 시켰다.
OECD 협상결과 지정화물도 제철원료 75%, 석탄류 75%, 액화가스류 50%를 제외하고는 99년부터 완전 폐지키로하고 연중 자유화 4개품목중 원유 50%, 비료원료 50%, 곡물류 50%, 석유화학공업원료 50%도 2001년부터는 전면 폐지키로 했다. 해운항만 개방과 자율화는 급물살을 타고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외국인 승선인원이 1천명을 육박하기에 이른다.
부두운영 효율화와 국영기업 민영화란 양대 추세에 발 맞춰 노·사·정 합의로 부두운영회사제(Port Authority), 소위 PA시스템 시행의 기틀을 마련하여 민자유치에 의한 항만시설 확충의 길을 넓혔고 따라서 항만 적체현상을 현저히 감소시키는 효과에 기대를 거는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하부조직인 부산지부 신임 지부장 필자와 선협 부산지구협의회 박을생 위원장(고려해운 부산지점장)도 이에 부응해서 지방청장 초청 간담회를 열고 항만분과위를 개최하여 부두민영화와 관련한 선주의견을 종합해서 윗선에 보고를 하기도 했다. 또 절대시설 부족으로 몸살을 앓는 부산항 컨테이너 부두 대체방안으로 가덕도 신항만 개발계획을 두고 학계와 업계의 의견을 듣고 이의 조속 실천을 위해 일간 신문이나 해운관련 전문지 또는 잡지에 밤을 새며 긴 분량의 원고를 써서 기고를 했던 기억도 난다.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釜山해운계 弘報창구·대변인役 보람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스크랩이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당시의 게재 내용을 읽으면 낡은 사진을 보듯 그 시절이 눈에 밟힌다. 한편 당시 부산의 일간 종합지나 경제지와 공중파 방송의 부산팀들은 해운과 관련된 주요 보도사항이 있으면 메인 포트의 기능이나 특성상 해운계를 상징하는 선주단체 대변인 격인 필자를 자주 매스컴에 올려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했다. 미녀는 낯 친구 추녀는 밤 친구라듯 서울선 쫓겨 왔어도 부산에선 그래도 곱다고 받아 주나니 이게 웬 별난 세상? 가끔 비중있는 코멘트나 주요 뉴스로 취급되어 로컬 스팟 타임에 부산 일원에만 방송되는 게 아니라 골든타임 뉴스로 전국에 걸쳐 공중파를 타게 되는 경우에는 가족이나 지인들로 부터 전화가 걸려 오는가 하면 단골 가게나 식당에 가도 더러는 알아 봐서 가문의 영광(?)으로 “나 테레비 나왔다”로 으쓱했던 때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에서는 어찌 감히 필자 차례가 그리 자주 올 법이나 한 일인가. 기억에서 멀어져 가지만 오래 간직하고픈 추억의 실타래로 가슴을 자맥질 한다.
그리고 한국해대도 전에 없던 놀라운 변화를 맞는다. 전통적으로 본교 출신들만이 기수별로 줄을 세우며 서열대로 총학장을 맡아 왔으나 기획원 예산실장을 거쳐 해운항만청장과 농림부장관을 역임한 서울대 출신 전임 조경식장관이 범 해대 출신들의 정서를 아랑곳 않고 총장 선거전에 출사표를 던져 해운계 예측을 뒤엎고 총장에 당선된 것이었다.
이제는 해대 발전을 위해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바 모교 출신들만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며 삼고초려 끝에 조장관을 천거한 최측근 선거 참모역을 맡았던 L교수가 필자를 찾아 왔다. 본교 출신 입장도 제3의 역외 입장도 아닌, 그러면서도 양쪽을 잘 이해하는 객관적 입장에서 필자의 생각은 어떠냐는 질문이 바로 업계의 분위기와 여론을 종합해 보려는 L교수의 간절한 요청이었다.
神仙臺부두서 “바다의 날” 기념 海運界 첫 열린음악회 개최
고교선배 L교수와는 평소 호형호제 하던 사이라 “감히 상상도 못할 돈키호테식 발상이지만 본교 출신인 형님이 타교 출신 조 장관을 모시겠다는 성숙된 역적모의(?) 같은 그 놀라운 발상과 용기에 우선 감탄하며 성공하면 학교 발전에는 틀림없이 대박이 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투표날 기자들이 현장에서 개표 결과 당선소식과 함께 정견발표(?) 내용을 알려 왔었다.
당시 필자에게 의미있고 인상 깊은 강한 메시지로 전달된 내용은 “나는 외부(Outside)에서 왔지 외계(ET)에서 오지는 않았다”였다. 인사에서는 학연 블록을 불식하자는 요지로 조도의 작은 반란을 몰고 온 명 연설이었고 그래서 남들은 잊었을 구절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 그 뒤 해기연수원 총회 등의 각종 회의에서 조 총장을 가끔 만나면 당신 옆자리로 필자를 권유하며 해박한 와인 지식과 함께 비교적 학교 얘기를 소상히 들려주곤 하던 기억도 새롭다.
한편 정부와 업계는 교통부 외청으로 76년 해운항만청이 발족한 3월13일을 ‘해운의 날’ 로 지정하여 그간 ‘해운진흥촉진대회’란 이름으로 선주협회가 중심이 되어 매년 기념행사를 해운계의 큰 잔치로 벌여 왔었다. 그러나 상공부 산하의 조선업을 합해 장관부처로 다시 승격해야 한다는 업계의 끈질긴 여망이 96년들어 결국은 해항청에 수산청을 합하고 해양경찰청을 산하에 두는 ‘해양수산부’로의 개편(법률 제5153호)이 확정되자 5월31일을 포괄적 개념의 ‘바다의 날’ 행사로 확대하고 첫 행사를 갖게 되었다.
새로 제정된 바다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해운업계로선 최초의 거국적 행사로 요새도 일요일 저녁의 인기프로로 장수하고 있는 KBS ‘열린음악회’를 선택하여 범 국민적인 축제를 겸한 홍보행사로 치르기로 했다. 전체 기획은 서울서 본부중심으로 준비를 진행시켰지만 관객 동원 책임은 부산에서 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 직원 모두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造船제외 海港廳·水産廳·海警廳 합해 海洋水産部 출범
수 만명을 동원하되 지역이나 업종별 성별 연령대 별로 골고루 초청한다는 원칙 아래 게릴러 콘서트 몰잇꾼이나 암표 판매상처럼 야간에도 시내 일원과 버스 안에서도 앞을 가로막고 일일이 초청장을 나눠 주던 일도, 달밤에 춤추는 개그프로 달빛 소나타 같아 해운계 그것도 부산근무를 하지 않고는 평생 누구도 체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집중 후원으로 신선대 컨테이너부두 특설 무대에서 5월27일 녹화에 들어가던 날 저녁은 부산 해운계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 인기 절정의 미스코리아 출신 MC 장은영 아나운서가 무대에 오르자 입추의 여지없이 운집한 관중들은 “바다의 날”을 연호하며 함성을 질러댔고 등단하는 연예인들도 이날 하루만은 바다와 배 그리고 항구와 하나되는 일체감으로 함께 황홀했었던 것 같았다.
공항서 행사장 오는 길이 막혀 출연이 불가능했던 ‘만남’의 여가수 N양은 오토바이에 실려 사이사이로 눈썹 날리며 곡예질주 끝에 무사히 도착,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고 해운업계를 대표해서 수준급 이상의 노래꾼으로 알려진 현대상선 박세용 사장이 멋들어지게 한곡을 불러 제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대미를 장식하기도 했다. <계속><코리아쉬핑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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