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02 06:04
KSG에세이/ 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4)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4)
한해가 마무리되던 75년 12월 교통부는 드디어 외항업계를 상당기간 지배하며 금단의 족쇄가 된 ‘외항해운업체의 면허기준 상향조정’을 발표하여 ‘향후 정부로부터 외항해운 사업면허를 받고자 하는 자는 선박보유량 총 10,000톤(G/T)이상에 자본금 2억원 이상인 자에 한한다’로 면허기준을 대폭 강화하기에 이른다.
겨우 몇백 톤 몇천 톤짜리 수척으로 해상운송사업을 해오던 대다수의 재래 영세업자들에겐 청천벽력이요 추상같은 명령이었으니 피해 갈 방법이 없는데다가 워낙 정부당국의 실행의지가 강해서 기준미달 선사들은 백방으로 묘수찾기에 동분서주하며 야단 법석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래서 소형선 한두 척씩을 가지고 시설기준에 크게 개의치 않고 영업을 해오던 이들 군소업체들은 이같이 외형기준이 강화되자 결국은 짝짓기로 몇몇 선사가 그룹을 지어 면허기준을 충당하는 이른바 ‘지입제’를 이용하여 겉으로만 버젓이 기준에 맞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한 회사에 이 배는 누구 것 저 배는 누구 것 했고 카운팅도 각자하는 기현상과 편법이 난무하기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1976년은 개항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다가 그해 3월 13일에는 교통부 산하 외청으로 항만청(Korea Port Authority)이 발족하고 초대청장에는 보안사령관을 지낸 K씨가 취임하는 등 우리해운 근세사에 한 획을 긋는 굵직한 일들이 숱하게 많았다.
1960년 6월 창립후 그간 한국선주협회 회장에는 설립당시 해운공사 사장으로서 초대를 지낸 석두옥씨에 이어 임광섭, 이맹기회장, 삼양항해의 한병기회장이 뒤를 이었고 그 해 2월 정총에선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전역후 코리아라인(현 대한해운)을 창업한 이맹기회장이 오랫만에 다시 선주협회장직을 맡게되고 상근부회장제를 이사장제로 바꿔 사무국 총수 이사장으로는 육군참모 총장을 역임하고 충주비료 사장을 지낸 김용배 예비역대장이 부임했으며 김병두 전무이사는 유임됐다.
부회장엔 범양전용선(현 STX 팬오션) 박건석사장, 이학철 고려해운사장, 신한해운 현영원사장, 조양상선 박남규사장, 해운공사 백용흠부사장이 이사진으로는 이정림 대한선박사장, 김상길 삼양항해사장, 남궁련 극동해운사장, 조상욱 아진해운사장, 박정순 태영상선사장, 윤정엽 쌍용해운사장, 양재원 동서해운사장, 윤종근 흥아해운사장, 협성선박 왕상은사장, 천경해운 김윤석사장, 코리아케미캐리 박종규 사장, 그리고 세방해운 이의순사장과 삼익상선 이종록사장이 감사를 맡았다.
신규발족한 항만청은 의욕적인 장기대책으로 ‘해운조선 종합육성방안’을 확정 발표하기에 이르고 세계항만협회(IAPH)에 가입을 하는가 하면 뒤에 선복확충의 근간이 된 제1차 계획조선사업을 착공하고 그해 12월의 국무회의는 매년 3월13일을 ‘해운의 날’로 지정하기에 이르고 관세청도 국적취득조건부 나용선(BBCHP)의 수입통관 지침을 시달하게 된다.
외항선복량은 300만톤을 돌파하여 세계 25위의 중진해운국 대열에 진입하게 되고, 경제규모도 15.2%라는 고도성장을 달성하여 81억달러 수출에 1인당 GNP도 698달러를 기록했다.
이때부터 감격적인 대망의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 달성’이란 참으로 꿈 같은(?) 목표를 향해 주무당국과 업계 그리고 온 국민이 ‘중단없는 전진’을슬로건으로 지금의 한국경제를 다지고 이룩하는 도약과 비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
이때 1군 직할 화학전투지원중대에서 중대장인 육군대위와 ROTC 소위를 하늘처럼 우러러 떠 받들며 전방 복무 3년을 마친 육군하사 출신의 필자가 당시 업무진행 라인을 군계급 위주 수직급으로 치켜 쳐다보니 아득하고 가물가물하기 이를 데 없었던 생각이 난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C교통부장관 산하에 보안사령관 출신의 K항만청장, 해군참모총장 출신의 선주협회장 및 역시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협회 사무국 이사장 그리고 옆자리 동료 비상계획부장은 중앙정보부 7국 부국장을 역임후 울산분실장을 지낸 C예비역 육군 대령으로 군복무시절 그 높은 계급들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만나기는 커녕 구경도 할수 없었으나 당시 전역한 별들과 영관급이 주위에 즐비하여 가히 하사계급으로서는 소름끼치고 가위 눌리기에 십상이었다.
한번은 C비상계획부장 왈 “왕년에 울산일대의 공단은 중정 분실장인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어디고 기공을 못했고 수입 지프차가 선물로 들어올 때는 내 발앞에 와서야 포장이 뜯겨 차바퀴가 처음 땅에 닿았다” 고 했고 당시 CIA 라면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고 했으니 충분히 그럴법도 했다.
질세라 필자 역시 “왕년에 첫 차관자금으로 울산 한국알미늄이 준공식을 할때 상공부 출입기자 B선배 대신에 약관 20대의 수습기자인 내가 박정희대통령을 수행했다”로 점심 후 남은 시간을 이용, 왕년 끗발을 겨루는데 느닷없이 이 광경을 지켜본 60만대군을 호령하던 육군참모 총장 출신 K이사장이 “왕년을 따진다면 나도 왕년이 있는데?”하고 한마디를 거들어 동료들이 한바탕 크게 웃던 대목이 잊혀지지 않는다.
정말로 손위 직계 상관들을 현역시절 군대계급으로 관등성명을 대려면 훈련소나 전방의 현역 근무시절 보다 훨씬 더 많은 무려 열두어개의 별들로 빼곡했으니 문자 그대로 별들의 행진, 스타들의 나열이었다고 하기에 충분했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라서기 보다 퇴역후에 장군들은 국영기업체나 대사급 외교관으로, 영관급은 정부기관이나 기업체의 비상계획부서장에, 그리고 위관급은 소위 유신사무관이라 해서 정부기관의 사무관 특채를 통해 전역자들에게 직업보도를 하거나 인사적체 해소도 겸하여 군에서 취득한 지식이나 노하우를 민간부문에 접목시키는 고육지책의 윈윈 인사정책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바다를 대상으로 하는 해운이란 업종에 배와는 무관한 육군출신이 더 많이 진출했고 항만이나 부두의 책임자로도 육군 출신이 상당수 전진배치 됐던건 5.16 이후에도 상당기간 지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들 해운정책 입안 라인들과 함께 일한다는건 사병 출신인 필자에겐 조직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 CPX 훈련이나 기동훈련 때처럼 늘상의 일과가 힘들긴 해도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경황 중에 차장에서 드물게 ‘부장서리’라는 희귀한 직위도 경험하며 짧은 기간, 약관 30대에 드디어 조사부장으로 고속승진(?) 하는 영예를 안아 주위로 부터 누구 빽(?)이냐 특혜냐 등등의 의아심도 사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추억이 새롭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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