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04 13:23
배값 폭락에 은행 대출금도 못갚는 소위 깡통배 즐비
국내 최대 부정기선사인 STX팬오션은 지난 1월 말 건조된 지 30년 된 삼미 오로라호를 중국의 선박 해체 조선소로 보냈다. 배가 오래됐어도 운항에 전혀 지장이 없었지만 세계 경기침체로 해운 물동량이 줄면서 몇 달째 운항을 하지 못했다. 배를 팔려고 검토해봤으나 이미 25년간의 감가상각이 끝나 중고선박시장의 배값이 고철 값(t당 27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회사 관계자는 "배를 놀리며 유지관리비용을 지출하느니 차라리 해체해 고철 값이라도 버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중견 해운업체 A사는 작년 17만t급 중고 벌크선(곡물·광물 등을 실어나르는 일반 화물선) 한 척을 1억2000만달러에 인수했다. 그런데 1년도 안 돼 최근 이 배값은 4000만달러로 폭락했다.
또 8만t급 벌크선 2척을 1년 전에 각각 8000만달러에 인수했으나, 최근 3000만달러로 반토막 났다. A사는 배 3척의 인수자금 가운데 80%를 은행 등에서 대출받았다.
그러나 담보로 잡힌 배값이 떨어지자 "추가 담보를 내놓으라"는 금융기관들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A사 관계자는 "배값이 워낙 떨어져 배를 팔아도 남은 대출금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인 불황의 여파로 배값이 폭락하면서 배를 팔아 금융기관의 대출 빚도 못 갚는 '깡통배'가 속출하고 있다. 선박가보다 은행 대출금이 더 커지는 이유는 해운업체들이 배를 새로 살 때 보통 배값의 70~80%를 선박금융으로 대출받아 조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값이 20~30% 이상 떨어지면 깡통배가 될 수밖에 없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에 따르면 18만DWT(재화중량톤수·선박에 적재할 수 있는 모든 화물의 중량)급 벌크선의 신규제작가격은 작년 8월 9600만달러에서 이달 초 7200만달러로 25%나 떨어졌다. 중고선 가격 하락은 더 심각하다. 1월 초 국제 선박 시장에서 건조된 지 7년 된 5만2479DWT급 벌크선이 2350만달러에 주인이 바뀌었다. 비슷한 규모의 선박이 작년 7월 6925만달러에 거래된 것과 비교하면 66%나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해운업 전문가인 김동현 산업은행 부부장은 "작년 중순과 비교하면 중고선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게다가 수명이 오래된 선박은 중고시장에서 헐값에도 안 팔려 아예 고철로 해체되고 있다. 해체되는 선박이 늘면서 선박 고철가격은 올해 1~2월 t당 270달러를 기록, 1년 전보다 50% 넘게 떨어졌다.
국내에서 깡통배가 늘어나자 해외 선주나 외국계 펀드 등이 눈독을 들이고 있다. 싼값에 깡통배를 사놓으면 나중에 경기가 회복될 때 비싼 값에 되팔아 차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내 해운회사들이 어려워지니까 해운업이 강한 그리스 선주들이 헐값에 선박을 사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면서 "일부 해운사는 구체적인 매각 제의도 받았다"고 말했다.
불경기에 우리 배를 헐값에 외국에 넘기면 해운경기가 회복될 때 배가 모자라게 된다. 그래서 정부와 정치권, 채권은행들은 '한국 깡통배'를 구제하는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민간 선박펀드를 만들어 매물로 나오는 선박을 사들인 후 해운사에 다시 빌려주는 방식으로 자금난에 빠진 해운업체를 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나라당 박상은 의원은 선박펀드 규제를 완화하는 '선박투자회사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하나금융지주는 은행의 자본금 확충을 위해 한국은행과 산업은행 등이 주도해 만든 자본확충펀드와 깡통배 처리를 연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은행들이 자본확충펀드로 배정받은 자금으로 선박펀드를 만든 후 깡통배를 사들이는 방식이다. 해운업체들은 국민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하나은행 등 금융기관에 모두 5조7000억원의 선박금융 빚을 지고 있다.<코리아쉬핑가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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