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이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는 내 차지였다. 아버지도 형도 누나도 없었다. 여유롭게 엄마 무릎에 앉아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선생님 동화 속에서 두꺼비는 지네를 물리쳐 처녀를 구하고, 유치원에서 제일 예쁜 경희가 꼬집어서 울음이 터지고, 집에 오는 길에는 점박이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쫒아가고…….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꼬닥, 꼬닥,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내 이야기를 엄마가 듣는데 내가 배부르고 잠이 솔솔 오는 거다. 그렇게 달고 아늑한 잠에 취했던 오후가 지나가고, 키가 훨씬 커진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떠들게 됐다. 엄마하고는 다르지만 친구 역시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친구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다. 언제까지나 질 것만 같았던 괴물 지네는 예쁜 경희하고 결혼을 하고, 바둑이는 술안주가 돼버렸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았다. 많은 불면과 숙취의 밤을 보냈다.
어느덧 끈적거리고 후텁지근한 밤이 지나가고 지금은 아득하게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때는 눈으로 말하고 어느 때는 담배연기로 말하면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이 바람이 머리칼을 쓰담, 쓰담 한다. 엄마의 꼬닥, 꼬닥 같은 파도소리가 들린다.
시원함에 배부르다. 엄마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나는 편하고 용기가 났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친구는 최고의 후원자였다. 그리고 바다는 수평선을 미소지우며 나를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 귀를 열어주고 지지해주고 있을까? 가족에게는 귀를 좀 많이 빌려주고 있을까? 부끄럽게도 들어주기보다 들려주기를 원했고 들어주는 이들에게는 단언으로 지지받기를 원했다. 많은 만남과 관계 속에서 불균형한 지지 구도로 인정받길 원했고 가족에게도 귀를 인색하게 사용했다. 그러나 관계와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받은 ‘Hearing’ 보다 많은 ‘Hearing’을 베푸는 것이 필요했다. 새해부터는 많은 만남과 관계, 가족 안에서 바다 같은 ‘Hearing’을 나눠야겠다. ‘Hearist’의 삶을 살아야겠다. 엄마가, 친구가, 바다가 내게 베푼 만큼 많이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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