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 브랜드가 국내 패션산업 생태계를 바꿔놓고 있다.
SPA는 ‘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의 약자로 제품기획, 제조, 유통, 판매까지 전 과정을 단일사업자가 자체적으로 주관하는 것을 뜻한다. SPA는 기존 의류업과 달리, 디자인기획, 생산, 판매가 동시에 진행되는 특징을 갖는다.
유니클로(UNIQLO)는 국내 SPA 브랜드의 선두주자다. 한국 유니클로는 일본의 패스트리테일링(Fast Retailing)사와 롯데쇼핑이 51:49로 출자한 에프알엘코리아(FRL코리아)가 운영주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유니클로의 2005년 국내 매출액은 205억원 규모에서 2014년 8954억원으로 무려 4268%나 상승했다.
유니클로는 ‘Unique, Clothing Warehouse’의 약자로 ‘독특하고 다양한 의류창고’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유니클로의 기본 전략방향은 패스트푸드 개념을 패션에 도입한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다.
유니클로의 특징은 기본형 위주의 소품종을 대량으로 생산한다는 점이다. 소품종 대량생산 전략은 생산비가 저렴한 중국을 생산기지로 활용하는 전략과 함께 저가격전략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유니클로보다 조금 늦게 한국시장에 진출한 자라(ZARA)와 에이치앤엠(H&M)의 경우도 수직통합으로 효율을 극대화하고, 시장 반응을 살펴 소비자 취향을 즉시 반영했다. 또 재고 최소화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등 SPA 시장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특히 자라는 ‘기획, 디자인, 생산부터 매장 배송’까지의 과정을 단 2주 만에 완료할 수 있는 ‘반응생산’ 체제를 구축해 대표적인 패스트패션 업체로 주목받고 있다. 자체 공장에서는 주로 ‘트렌드에 민감한 디자인’ 의류를 생산하는데, 15%는 사전에 생산하고 나머지 85%는 고객의 반응을 살피고 생산한다. 공장별로 원단 등 생산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생산라인 가동률을 여유 있게 유지함으로써 갑작스런 생산량 증가에도 유연하게 대처한다. 또 축구장 50개 규모의 본사 물류센터에서는 1시간당 6만벌의 의류에 가격표를 부착하고 즉시 판매가 가능한 상태로 포장해 최대 40시간 안에 전 세계 매장으로 배송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공급망(Supply Chain)’이 바뀌다
패스트패션은 ‘중저가 패션산업은 수익을 내기 어려운 사양산업’이라는 기존 상식을 무너뜨렸다. 패스트패션으로 촉발된 패션산업의 변화는 유통 · 물류, 섬유 · 화학, 소비재, 서비스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대됐다.
특히 IT · 미디어 환경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유행의 전파속도와 지속시간이 크게 단축됐다. 소비자들은 유 · 무선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패션 관련 정보를 쉽게 접하게 됐고, 저렴하면서도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의류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경쟁이 시작되고 공급망 관리방식이 진화됨에 따라 패션산업의 가치사슬 역시 빠르게 분화하기 시작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공급망 관리업체인 홍콩의 리앤펑은 전 세계 7500여개 생산업체들을 관리하며 주문받은 의류를 대신 생산해 납품하고 있다.
전통적인 패션기업은 일반적으로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 패션쇼를 통해 신상품을 선보이고, 사전에 대량생산으로 규모의 경제를 실현했다. 하지만 패션 트렌드와 수요가 빗나가면 판매부진, 재고증가로 인해 경영난에 봉착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2000년대 초 잘못된 상품기획으로 경영위기를 맞았던 미국의 의류업체 ‘갭(GAP)’ 사례를 꼽을 수 있다.
패스트패션 기업은 최신 패션 트렌드를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고객수요에 따라 상품 물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반응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패스트패션 기업은 시즌 중에도 트렌드 변화를 반영해 상품의 디자인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상품을 생산해냈다. 베네통은 수요가 안정적인 흰색 스웨터를 대량 생산한 후, 유행에 맞춰 다양한 색상으로 염색하는 후염공정을 도입해 리드타임을 단축했다. 상품기획, 생산 · 물류, 유통 · 마케팅 등 가치사슬을 아우르는 통합시스템을 구축해 효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반응생산을 실현한 셈이다.
반응생산은 전사 차원에서 패션 트렌드와 고객반응을 수집하고, 이를 가치사슬 내 구성원들과 신속하게 공유하는 게 핵심이다. 이는 생산량 조절로 연결돼 비용절감 효과도 거뒀다. 또 새로운 상품을 더 자주, 더 빨리 매장으로 운송할 수 있도록 비용절감보다 기간단축을 우선하는 물류원칙을 택했다. 시즌 중에는 선박, 차량 대신 항공을 이용해 배송기간을 단축했다. 추가 물류비용은 재고회전율을 높여 이에 따른 매출 증대로 상쇄했다.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에 맞춰 여러 종류의 상품을 소량으로 자주 배송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울러 매장과 디자인 부서, 매장과 물류센터가 IT 시스템을 통해 직접 소통하는 구조를 실현해 불필요한 절차와 소요 시간을 줄였다. 공급망 하류상의 고객 수요의 변동이 공급망 상류의 생산시설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수요의 변동폭이 확대되는 ‘채찍 효과’도 방지했다. 갭은 RFID를 이용한 실시간 상품 추적과 정보 공유를 통해 재고를 관리했고, 자라는 매장담당자가 PDA와 전화를 통해 본사 관리자와 직접 통신해 재고정보를 공유할 뿐 아니라 상품에 대한 고객 반응을 전달한다.
동대문 ‘패스트패션’ 선도, 하지만…
동대문 시장은 일찍이 패스트패션을 선도해온 국내 최대 패션산업의 메카다. 지난달 18일 새벽, 동대문 시장을 찾았다. 시장에는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소매업자, 온라인 쇼핑몰 운영자, 중국인 바이어 등 다양한 이들이 뒤섞여 불야성을 이뤘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따르면 동대문에 분포한 소매점 약 1만2000여개, 도매점 약 2만3000여개며, 전국 의류유통의 약 30%를 차지한다. 국내 인터넷 의류쇼핑몰 제품의 70%는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조달된다.
동대문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입(의류구매대행)’이라는 직업이 있다. ‘사입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소매상을 대신해 도매상으로부터 물건을 구매해 배달한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사입자는 보통 100~300개의 거래처를 확보하고 있다.
공장에서 도매로 도매에서 다시 소매로 물품이 운송되는 과정에선 자전거, 이륜차, 라보, 다마스, 택배차, 용달차, 5톤, 버스 등 다양한 운송수단이 동원됐다. 지게를 이용해 물품을 배달하는 지게꾼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얼핏 보면 동대문의 공급망은 체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획, 생산, 유통 등 전과정이 하나하나 촘촘하게 잘 짜여있다.
중앙대학교 의류학과 홍병숙 교수의 논문 ‘동대문 패션시장의 기술 활용 의도에 따른 QR시스템 효과에 대한 인식 연구’를 보면, 동대문 시장의 신속한 생산시스템은 유통단계를 축소시켜 중간마진을 줄여 소매가격을 낮췄다. 또한 신상품 출시 후 2~3일 이내 소비자 반응을 얻지 못하면 바로 재고처리하며, 수요에 대응해 잘 팔리는 상품과, 그렇지 못한 상품을 실시간으로 확인해 재고가 거의 없는 생산체제를 유지한다. 이는 패션과 관련된 모든 원부자재와 생산 공장, 서비스 등이 동대문과 그 주변에 집중돼 있고, 다양한 거래조정양식으로 인해 시장 거래 시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업체 간 네트워크가 형성된 점도 공급망을 원활하게 하는 요인이다. 오늘 생산된 상품이 내일 중국, 대만, 일본에서 팔리는 신속성 뒤에는 운송에 관여하는 위탁업자, 포장업체와의 네트워크가 있다. 여기다 패션에 관련된 모든 업종과 서비스가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는 시장거래중심의 생산시스템으로 인해 동대문 패션시장은 경기변동에 따른 조정이 유연한 편이다.
동대문은 우수한 패스트패션 생산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글로벌 SPA 브랜드에 시장을 조금씩 빼앗기고 있다. 전문가들은 동대문 도매상에 의한 제품기획 및 주문 위주로 차별화된 상품 기획능력은 부족하며, 동대문을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디자이너의 존재감도 희박하다고 지적한다. 또 봉제업 종사자 중 50대 이상 비율이 전체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숙련인력의 고급 · 특수 기술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기획에서 생산, 판매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동화된 기계 및 기술 도입도 절실하다. 이는 동대문 시장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책적인 차원에서 자금을 지원하거나, 공동으로 정보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볼 만하다.
< 김동민 기자 dmkim@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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