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아해운 매각이 1년 만에 다시 무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21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STX컨소시엄은 흥아해운이 인수절차 진행 중 신주인수계약서상 진술과 보장, 확약 기타 의무를 위반하고 흥아해운의 귀책으로 중대한 부정적인 영향이 발생했다는 이유를 들어 신주인수계약을 해제했다. 계약해제일은 지난 18일이다.
흥아해운도 같은 날 신주인수계약상의 ‘기업결합신고 완료’ 등 거래선행조건이 충족됐음에도 투자자의 계약해제 통보로 거래가 무산됐다고 공시했다.
흥아해운은 지난 7월16일 STX컨소시엄을 인수합병(M&A)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뒤 같은 달 27일 양해각서, 10월20일 본계약을 잇달아 체결했다.
STX마린서비스와 STX 경영권 지분을 보유한 중국계 사모펀드 APC프라이빗에쿼티(옛 AFC)가 짝을 이룬 STX컨소시엄은 입찰가 1200억원을 제시해 흥아해운 인수전을 거머쥐었다. STX에서 360억원, APC에서 840억원을 조달한다는 계획이었다.
본계약 과정에서 전체 투자금의 10%인 120억원을 계약금으로 지급한 데 이어 이날(21일) 잔금을 치르고 경영권을 넘겨 받을 예정이었다.
STX는 계약 해제 소식을 알리면서 흥아해운의 귀책사유로 계약이 해제돼 질권 설정 중인 계약금 120억원의 반환을 청구했고 거래 무산으로 발생한 손해도 별도로 청구하겠다고 덧붙였다.
계약 해제 사유로 든 건 흥아해운 계열사인 흥아프로퍼티의 장기대여금인 것으로 파악된다. 흥아해운이 지난 2007년 필리핀 수빅 지역 부동산 개발을 위해 설립한 흥아프로퍼티는 필리핀 현지에 세운 특수목적회사(SPC) 네오코브필리핀(Neocove Philippines Corporation)을 통해 부동산을 매입해 사업을 벌여왔다. 사업 과정에서 SPC에 약 320억원을 장기대여했다. STX는 흥아프로퍼티의 대여금이 사실상 회수 불가능한 부실 채권이라고 주장하며 계약을 깬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흥아해운 측은 STX가 인수자금을 구하지 못해 계약을 파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 부동산 가격이 현재 1000억원대에 이르는 점에 미뤄 흥아프로퍼티의 장기대여금이 부실하다는 STX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설명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STX 측에서 잔금 1080억원 중 400억원을 조달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책금융기관 등과 접촉해 인수대금 대출을 타진했으나 끝내 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STX의 PK밸브 인수 무효화 추진
STX가 애초부터 산업용 밸브 제조회사 PK밸브를 타깃으로 흥아해운 인수전에 뛰어든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STX는 흥아해운 M&A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뒤 흥아해운의 알짜 자회사인 PK밸브 입찰에도 뛰어들어 우선협상자가 됐고 지난 9월 지분 37.37%를 180억원에 인수하는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흥아해운은 현재 STX의 PK밸브 인수를 무효화하는 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자사 M&A가 무산됐기 때문에 패키지딜 형태로 진행된 PK밸브 지분 매각도 원천무효란 입장이다.
흥아해운 매각 무산을 두고 채권단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나온다. 채권단이 입찰에 참여한 회사의 경영 철학이나 인수 의지, 사업계획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단지 가격만을 기준으로 우선협상자를 선정해 화를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지난 입찰에서 KSS해운은 같은 탱크선 전문선사로서, 어느 누구보다 흥아해운 인수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채권단에서 높은 입찰가를 제시한 STX컨소시엄의 손을 들어주면서 고배를 마셨다.
이로써 흥아해운은 1년 만에 다시 경영권 매각이 불발되는 사태를 맞았다. 공교롭게도 거래를 파기한 상대방이 모두 사모펀드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지난해 12월 말 카리스국보는 흥아해운 최대주주인 이내건 콩힝에이전시 회장 측 보유 지분 14.05%(1400만주)를 112억원에 매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가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거래를 해지한 바 있다.
흥아해운 측은 차순위협상자인 KSS해운·SBK컨소시엄과 곧바로 협상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KSS해운·SBK컨소시엄은 입찰 당시 STX컨소시엄보다 200억원 낮은 1000억원을 써낸 것으로 알려졌다. SBK파트너스가 무한책임투자자(GP), KSS해운이 유한책임투자자(LP)로 참여하고 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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