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17 13:58

기획/해운업계 일-대만항로 개방 압박 재가동

정부측에 건의서한 발송, 한-대만경제회의서도 안건 상정
“민관 다양한 채널로 접근해 항로개방 성사돼야”

●●● 세계적인 경기불황으로 해운시황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연근해 항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20%를 넘나드는 한일항로와 한중항로, 동남아항로 등의 물동량 감소세로 선사들의 표정이 마냥 어둡다.

이런 가운데 국적선사들이 일본과 대만간 정기선 항로 개방에 다시 한번 힘을 모으기로 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선주협회는 최근 일본-대만항로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건의하는 서한을 국토해양부에 보냈다.

中 수교 뒤 대만, “항로 접근금지!”

일-대만항로에서 한국선사가 취항을 못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중국과 수교를 맺은 지난 1992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 정부는 새로운 거대 시장으로 무섭게 떠오르는 중국의 매력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대만과 국교를 단절해야만 했다. 대만은 세계 여러나라들이 앞다퉈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자, 중국과 국교를 맺은 나라와는 단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그런 점을 알면서도 대만 정부에 아무런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터 대만과의 국교단절을 자초하고 말았다.

문제는 대만과의 단교로 우리나라 선사들이 일본-대만항로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대만정부는 국교단절 당시 우리나라에 여러 경제보복조치도 단행했다. ▲한국산 자동차 수입쿼터 취소 ▲사과·배의 구상무역 금지 ▲한국과 대만간 국적선 항공운항 중단, 한국적 선박의 대만-일본 노선 취항 금지 ▲60만달러 이상의 정부조달사업에 대한 한국업체의 참여 제한 ▲정부 및 민간간 정기 경제협력회의 중단 등이다. 다만 국교 단절 후에도 한국-대만항로는 양국의 필요성에 의해 봉쇄를 면할 수 있었다.

다양한 보복조치들은 지난 2001년 대만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전후해 대부분 해결됐으나 한국적 선박의 일본-대만항로 취항금지조치는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대만전력공사는 대량화물 수송입찰에서 한국선사들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제한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과 대만 해운업계는 지난 1983년 9월 상호 해운협정을 체결한 뒤 활발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국교단절에 따른 해운시장 봉쇄는 선사들에게 적잖은 타격이었다. 특히 일-대만항로는 한-대만항로보다 물동량이 두 배 이상 많은 노른자위 항로였던 터라 한국선사들은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한-대만항로 수송량이 20만TEU 안팎이었던 반면 일-대만항로 물동량은 55만TEU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세계 해운시장에서 거점항(허브포트)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환적화물수송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점도 일-대만항로를 개방해야 한다는 한국선사들의 목소리에 힘을 싣게 하는 이유다. 우리나라 외항해운 수입의 절반 가량이 3국간 화물운송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선사들의 해상노선은 일부 원양선사들을 제외하고 한일항로와 한중항로, 동남아항로 등 아시아 역내항로에 집중돼 있다. 좁은 해운시장에서 3국간 해상서비스의 활발한 개척은 히든카드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남아항로의 길목에 있는 일-대만항로의 접근금지가 결국 한국선사들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는 지적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셈이다. 원양선사들의 경우도 일본과 대만을 경유하는 다양한 원양항로를 구축할 수 있음에도 항로 봉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현재 일-대만 항로를 들여다보면 대만선사들의 저운임 영업으로 일본 선사들의 비중은 5% 미만이다. 항로가 개방돼도 당장 우리 선사들이 참여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3국간 서비스 루트를 다변화한다는 측면에서 반드시 항로가 우리나라 선사에 개방돼야 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한국 정부와 해운업계는 국교 단절 이후 일-대만항로 개방을 위해 외교적인 채널을 통한 접근이나 경제협력체를 통한 다자적인 협상 등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한-대만 경제협력위원회,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담 등 다각적인 방법과 창구가 동원됐다. 특히 지난 1998년 대만선사에 한일항로를 허용한 것은 대만정부의 전향적인 정책을 끌어내기 위한 선제적 대응이었다. 먼저 문을 열고 상대방과 협상에 나서겠다는 포석이었던 셈이다.

“한일항로 개방 10년째, 대만 미동도 안 해”

2003년 12월2일 대만에서 열린 제 28차 한-대만 경제협력위원회 합동회의에선 한국측 대표였던 박용오(성지건설 회장) 단장이 개회사에서 이 항로 개방을 대만측에 강력히 촉구했다. 경제협력회의 개회사에서 거론할 만큼 해운업계가 이 문제의 중요성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당시 선주협회 정해용 상무도 해운부문 발제에서 다시 한번 일-대만항로와 대만전력공사 수송입찰에서 한국선사들의 진입제한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선주협회는 같은 해 12월엔 주한 타이베이 한국대표를 만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일항로를 개방한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대만정부는 일-대만항로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다. 한국과 대만의 국교가 단절된 지 17년이 지난 시점이다. 그간 선주협회는 해마다 이 항로의 참여제한 철폐를 주요 사업안건으로 상정하고 대만선주협회 측에 공식적인 회담개최를 제안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만 당국의 미온적인 태도가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믿었던 WTO·DDA 협상도 지난해 7월 결렬되면서 항로 취항에 대한 기대를 더욱 불투명하게 했다.

이런 가운데 선주협회가 다시 정부에 항로 개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설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번 대정부 건의는 민간 채널과 함께 정부를 통한 전방위 압박의 신호탄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장 오는 29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제34차 한-대만 경제협력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강력히 주장할 계획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대만국제경제합작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번 회의에선 양국간 해운과 항공, 의료관광 등에서의 협력방안 등이 논의될 예정이다.

해운업계에선 대만측이 적극적인 자세로 이 문제를 검토하도록 공세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한일항로에서의 대만선사 퇴출이 바로 그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대응하자는 논리다. 우리나라만 일방적으로 해운시장을 개방하고 있는 것은 호혜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불만이 반영된 것이다.

선주협회도 건의문에서 “이미 글로벌화돼 유·무형의 장벽이 거의 없어진 국제해운시장에 아직까지 시대착오적인 진입장벽이 존재하고 있다”며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 한국선사에 일-대만항로를 개방할 때까지 대만선사에 대한 한-일간 물량적취 금지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일항로를 대만선사에 개방한 지 10년이 흘렀음에도 상응하는 대만 정부의 조치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데 국가 자존심이 훼손됐다는 주장이다.

선주협회 관계자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해운업계는 대만측에 일본-대만항로의 개방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으나 반영되지 않았다”며 “그동안 우리 태도가 너무 미온적이었지 않느냐 반성을 하게 된다.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한일항로 봉쇄 맞불” 주장도

보복조치에 대해 정부는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무리하게 압박에 나설 경우 오히려 다른 대만 기점의 항로를 취항하는 국적선사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국토해양부 관계자는 “맞대응은 선사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며 “대만 선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있는 선사들은 신중한 반면 한일항로 협의체(한국근해수송협의회, KNFC)는 강경한 입장”이라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한진해운이 대만 양밍선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활발한 해운서비스를 벌이는 반면 KNFC 회원선사들은 한일 수입항로에서 대만 에버그린이나 양밍, TS라인 등과 각축을 벌이고 있는데다 프랑스 CMA CGM의 자회사인 대만계 CNC라인도 한일간 로컬항로에서 노선을 꾸리고 있어 신경이 날카롭다.

국토부는 다만 공식적인 대화창구를 통해 항로개방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전달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 국토부는 17일 주한 타이베이 한국대표부를 방문해 이에 대해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같은 현안을 놓고 주무부처인 국토해양부와 외교통상부 간 입장차이를 보이고 있어 문제로 지적된다. 국토부는 대만정부와의 적극적인 협상을 원하고 있는 반면 외교부는 양국간의 관계악화를 의식해 이 문제를 놓고 지나치게 대만당국을 자극해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 “정부가 자국 기업이 외국기업과 비교해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며 “한국 해운산업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임을 당국이 분명히 인식해서 해결책을 찾아달라”고 주문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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