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부산과 동남권을 해양수도권으로 조성하는 정책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국내 대표 해운기업인 HMM의 직원들이 부산 이전을 결사반대하고 나서 주목된다.
이재명 정부는 대선 공약인 해양 분야 정부기관과 기업의 부산 이전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 2위 환적 허브인 부산을 해양수산부를 포함한 해양 행정 사법 금융 기능이 집적된 해양수도권으로 조성해 서울·수도권과 함께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지난 8일부터 이사를 시작한 해양수산부는 12월21일까지 이전 작업을 마치고 새해부터 부산 청사 시대를 열 계획이다.
SK해운·에이치라인해운 서울근무 100명 안팎
해운기업들도 부산 이전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SK해운과 에이치라인해운은 지난 5일 부산 영주동 코모도호텔에서 본사를 부산으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두 선사는 조만간 주주총회를 열어 본점 소재지를 부산에 둔다는 내용으로 정관을 개정한 뒤 내년 1월 안으로 본사 이전 등기를 마친다는 구상이다. 주총 개최일은 SK해운은 12월23일, 에이치라인해운은 1월2일로 각각 잡혔다.
이들 기업은 이전 등기가 마무리되면 내년 상반기에 사옥을 마련해 직원 이주에 들어갈 예정이다. 전체 인력은 SK해운이 1400명, 에이치라인해운이 1100명 정도지만, 서울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각각 120명 60명 수준이어서 생각보다 이전에 따른 후유증은 크지 않을 걸로 보인다.
회사 측은 이전 절차가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시점에 맞춰 직원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 그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해 이관 계획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SK해운과 에이치라인해운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부정기선사다. 두 회사 모두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에서 소유하고 있다. 1982년 SK그룹의 해운 계열사로 설립된 SK해운은 원유와 석유제품 LNG(액화천연가스) LPG(액화석유가스) 등의 에너지를 전문 수송하는 해운사다. 지난 2018년 한앤컴퍼니에 매각됐다.
에이치라인해운은 2014년 사모펀드가 한진해운 벌크부문을 인수해 설립한 기업으로, 철광석 석탄 LNG 등 원자재와 에너지 화물을 중심으로 해운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16년 현대상선(현 HMM)의 벌크 전용선 부문을 인수하면서 사세를 크게 늘렸다.
매출액을 기준으로 한 국내 해운사 순위에서 SK해운은 7위, 에이치라인해운은 9위에 각각 올라 있다.
두 회사는 해양수도권 조성에 따른 시너지를 겨냥해 본사의 부산 이전을 결정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김성익 SK해운 사장과 서명득 에이치라인해운 사장은 “본사 부산 이전은 단순한 소재지 변경이 아니라, 글로벌 해운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는 환경 속에서 본원적 경쟁력과 장기적 생존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라며, “해양수산부와 부산 해양·금융 클러스터와 긴밀히 연계해 해양물류 경쟁력을 높여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재수 전 해수부 장관은 “이전 기업과 임직원이 부산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관계 부처, 지자체, 공공기관과 협력하여 실질적이고 전방위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산 이전하면 HMM 경쟁력 약화
반면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에 포함된 HMM은 노조의 반대가 강경해 부산 이전 계획이 난항을 겪고 있다. HMM 육상 노조는 SK해운과 에이치라인해운의 부산 이전 계획 발표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인 12월4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상급 단체인 전국사무금융서비스 노조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부산 강제 이전을 강하게 규탄했다.
이날 HMM 정성철 육상 노조 위원장은 “대선 기간 부산 이전 공약이 언급된 이후 직원들은 언제 근무지가 바뀔지 몰라 근심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고 삶의 근본인 집을 구하는 결정조차 힘들어한다”며 직원들이 일상을 회복하고 업무에 집중하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HMM 본사 이전 추진을 즉시 철회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정 위원장은 “전재수 장관이 1월 중순까지 이전 로드맵을 발표하겠다고 예고한 상황에서 회사는 타당성 검토 결과도 없는 상태에서 로드맵을 작성해 해수부와 해양진흥공사에 전달하고 있다”며 “정부가 나서서 민간 기업의 노동자를 탄압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사측에서 지난 8월 작성한 조사보고서에서 전체 조직이 이전하든, 일부 조직만 이전하든 부산으로 이전하면 현재보다 회사 경쟁력이 약화하는 걸로 나타났다고 지적하면서 “타당성 없는 본사 이전에 끝까지 맞서 회사의 경쟁력을 지켜내고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사수하겠다”고 선언했다. HMM 노조는 정부가 자사의 부산 이전을 밀어붙일 경우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계획이다.
기자회견에선 노조 집행부뿐 아니라 일반 직원들까지 나와 부산 이전의 부당성을 성토했다. 자신을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 맘이라고 소개한 조모씨는 “본사 이전은 단순한 인사이동이 아닌 가족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라며 “딸아이가 산타에게 ‘우리 가족 떨어져서 살게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소원을 쓴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이 현실화하면 주말부부가 되거나 경력 단절을 감수해야 한다”며 “정부가 해양수도를 명분으로 노동자의 삶을 희생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함께한 이재진 사무금융노조 위원장은 “정부는 스스로 국민주권정부를 자처하지만 HMM을 정치적 목적에 활용하고 있다”며 “HMM은 코로나19사태 당시 국가 물류망을 지켜 온 핵심 기업인데, 이를 정치 계산의 도구로 삼는 건 산업 기반을 흔드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승현 일반사무업종본부장은 “정부가 부산 이전을 강요하면서 1000여 명의 서울 거주 HMM 노동자들의 생계가 하루아침에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했다”며 “이주가 어려운 이들은 사실상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지만 정부는 이런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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