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내년부터 컨테이너선사들의 전략적 제휴(얼라이언스)를 허용하지 않기로 하면서 시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번 조치로 EU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선복 부족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내년 4월25일 일몰되는 컨테이너선사 컨소시엄 독점금지법 일괄 적용 면제(CBER) 규정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현재의 시장 환경에서 CBER 제도가 당초의 도입 목적에 맞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게 이 같은 결정의 배경이다.
CBER 제도는 운임동맹(shipping conference)이 폐지되고 2년이 채 안 된 2010년 4월 시행됐다.
EU는 지난 2008년 10월18일자로 컨테이너운임 공동행위체인 운임동맹의 독점금지법 적용 면제 규정을 폐지했다. 이 조치로 130년 역사의 구주운임동맹(FEFC)을 비롯해 기간항로의 주요 운임협의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U는 대신 이듬해 9월 가격 담합을 하거나 시장점유율 30%를 초과해선 안 된다는 단서를 달고 컨테이너선사의 컨소시엄 구성을 허용하는 CBER 도입을 결의했다. ▲운항 일정, 항만 입항 결정 ▲선복 교환 또는 판매 ▲선박과 항만시설 공동 운영 ▲공동 사무소 이용 ▲컨테이너박스 등의 장비 지원 ▲수요공급 변동에 대응한 수송능력 조절 ▲항만터미널과 관련 서비스 공동 운영 또는 사용 등의 선사 간 협력을 독점금지법 적용 대상에서 면제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근거로 정기선사들은 공동운항 그룹인 얼라이언스(Alliance)를 유지할 수 있었다. 현재 기간항로상에서 운영되고 있는 얼라이언스는 ▲세계 1~2위 선사인 MSC 머스크가 결성한 2M ▲우리나라 HMM과 일본 오션네트워크익스프레스(ONE), 대만 양밍, 독일 하파크로이트가 결성한 디얼라이언스(TA) ▲프랑스 CMA CGM, 중국 코스코, 홍콩 OOCL, 대만 에버그린으로 구성된 오션얼라이언스 3개다.
EU는 이후 2015년부터 5년간 CBER를 연장한 데 이어 2020년에도 2024년 4월25일까지 4년 더 제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해상운임, 선복 공급, 정시운항률 같은 경쟁 조건이 과거 5년간 악화하지 않았다는 게 2020년에 일몰 연장을 선택한 이유였다. 시장 변화를 좀 더 명확히 평가한다는 명목으로 기간은 4년으로 제한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코로나발 공급망 대란으로 컨테이너 운임이 급등하고 선복 부족이 첨예화하면서 화주들은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는 유럽화주협회 등의 화주단체가 CBER 폐지를 촉구하는 계기가 됐고 EC는 지난해 8월9일부터 10월3일까지 두 달간 화주와 해운업계 물류업계 항만업계 등을 대상으로 해운사 독금법 면제 제도에 대한 의견을 듣는 절차에 돌입했다.
조사에서 글로벌화주포럼 유럽농업농식품무역동맹위원회 국제물류주선업협회 유럽바지선협회 항만터미널 해양노조 등의 다양한 단체가 CBER 폐지를 요구했다. 반면 CBER를 연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 곳은 세계선사협의회(WSC)와 국제해운회의소(ICS) 아시아선주협회(ASA) 등의 해운단체로 한정됐다.
의견 청취와 제도 재검토 과정을 거친 EC는 결국 CBER 일몰이 반 년 앞으로 다가온 올해 10월10일 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이해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2020년부터 올해까지 4년 동안 CBER의 효과가 기대에 못 미치거나 제한적이란 근거를 확보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얼라이언스 수가 적어 해운사들의 비용 절감 효과가 크지 않은 데다 중소 해운사가 대형 선사에 대응해 협력하고 대체 서비스를 제공토록 하는 기능을 CBER 제도가 더 이상 하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EU는 다만 CBER 폐지로 선사 간 협력이 모두 불법이 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선사들이 공동행위(카르텔)를 금지하는 EU기능조약(TFEU) 101조 규정을 준수하는 자체평가서(self-assessment)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협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디디에르 레인더르스(Didier Reynders) EC 법무위원은 “해운서비스는 유럽과 전 세계 무역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지만 해운사 합병, 글로벌 제휴, 수직적 통합 등의 중대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거치면서 시장이 새롭게 바뀌었다”며 “해운사를 대상으로 하는 독금법 일괄 면제 규정을 더 이상 새로운 시장 상황에 적용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자체평가서 제출하면 선사간 협력 허용돼
해운업계는 EU 조치를 두고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금지된 공동운항 대신 선복 판매(슬롯차터)나 선복 교환(슬롯스와프) 방식으로 선사 간 협력을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17일 열린 해사경쟁법연구회 9차 모임에서 “EU의 이번 결정으로 선사들은 선복공유협정(VSA) 즉 얼라이언스를 하지 못하게 돼 2~3척의 선박만 넣고도 운영할 수 있었던 유럽항로 1편에 앞으로는 자사 선박을 모두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면서도 “다만 컨소시엄을 구성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슬롯차터는 CBER 폐지 이후에도 독금법에 위반되지 않을 걸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영남대 로스쿨 심재한 교수도 “개별적으로 용선 계약 형태로 남는 선복을 다른 선사에 빌려주는 게 EU 경쟁법을 피해가는 방법이 될 것 같다”고 김 교수 의견에 동의했다.
HMM 남재일 부장은 “(2M을 구성하고 있는) 머스크와 MSC는 유럽지역에서 시장점유율 30%를 넘기 때문에 내년부터 얼라이언스를 해지하기로 했고 오션얼라이언스도 30%를 조금 넘어 조정이 필요하다”며 “(HMM이 속한) 디얼라이언스는 30%가 되지 않아 자체평가서만 제출하면 현재 기준에선 문제가 없을 같다”고 말했다.
대신 디얼라이언스의 계약 방식을 VSA에서 선복판매협정(SCA)으로 변경하는 문제를 연말 전까지 실무적으로 정리한다는 입장이다.
제도 폐지 효과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해운업계는 선복이 부족해질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반면 화주 측은 선복 확보가 쉬워질 것으로 예상했다.
김인현 교수는 “한 선사가 한 개 노선에 자사선을 모두 투입하려고 다른 노선에서 선박을 빼게 되면 철수하는 노선이 생길 수 있다”고 관측했다. 한국근해수송협의회 김근홍 국장은 “이번 조치로 HMM 머스크 MSC 등의 선사들이 자신들이 강점이 있는 항만에만 기항하는 식으로 노선을 운영하면 화주가 선복을 못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면 삼성SDS 이종덕 부장은 “화주 입장에선 선복 확보가 용이해질 것으로 본다”며 “독자적으로 노선을 운항하는 선사가 남는 선복을 다른 선사에게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지금보다 선복 운용이 여유롭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이경희 기자 khlee@ksg.co.kr >
0/250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