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02-14 18:05

[ 不況이란 시간과 비용과의 싸움 ]

배병휴 <매일경제 주필>

97년의 고뇌와 선택.
올해 우리경제는 여러모로 어렵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잘못하면 선진국 문턱에서 멕시코사태로까지 추락할 위험이 지적되기도 한
다. 97년도 국정방향이 어렵고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도 이같은 상황때문
이었다. 정부도 결국은 고뇌의 선택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지난해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해는 성장과 물가와 국제수지방어등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겠다고 고백한 것이 그석이다.
구체적으로 올해 경제성장률은 물가와 인플레 심리를 자극하지 않는 잠재
성장력 범위내로 끌어가겠다는 경제정책방향을 공표했다. 이에따라 금년도
성장률은 6%나 그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성장률을 낮춘다
는 것을 고뇌의 선택이라 표현하는 것은 정부의 오랜 관습이나 국민의 인
식 때문이다.
정부는 경제성장률을 정책의 성공지수로 내세워 왔고 국민은 높은 성장률
이 좋은 경제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배경으로 보면 정부는 인기하락을 각오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선택
했노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선거가 있는 해이므로 집권당이 경제정책과 선거를 연관시키
려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저성장이 여당에 불리하다고 판단하며
경기부양을 독촉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에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
런지는 미지수이다. 그렇지만 96년도 국제수지적자 2백30억달러를 보고 올
들어 계속 무역수지가 큰폭으로 적자행진을 계속하는 상황을 그냥두고 정
치권 논리에 흔들린다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잃게될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97년은 경제문제를 두고 정부와 정치권과 국민간에 인내와 저항의
대립을 면키 어렵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기회와 올가미의 고비용.
우리경제가 구조적으로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진단이 거의 정설이다.
경기순환주기에 따른 불황이기 보다 장기간 고비용구조가 축적되어 단기간
에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뜻이다.
금리와 땅값, 그리고 임금과 물류비가 꾸준히 올라 고비용구조가 형성되었
으니 이를 하루 아침에 끌어내릴 방도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정부는 재계를 설득하며 경쟁력 10%이상 높이기 시책을 펴고 있지만 금방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경제는 중장기적인 안목
으로 비용을 끌어내리고 경쟁력을 회복할 수 밖에 없다는 자세로 대응할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그동안 정부는 개혁을 통해 성과도 올렸지만 다시 비용을 높인 경우도 적
지 않다.
금융실명제가 금융소득종합과세가 과소비를 유발하고 창업과 투자의욕을
저해한 작용을 했다. 정경유착이나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찬성했던
실명제가 돈의 흐름을 억제하고 기업의욕을 감퇴시켰다면 그것은 부작용이
다. 당초 취지와는 달리 개혁과정이 잘못 운용되었다고 지적될 수 있다.
정부가 노동관계법을 무리하게 개정했던 것도 경제활력을 회복시키겠다는
의도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민감한 문제들을 확대 표출시켜 노
사간 감정적 대립을 격화시키고 말았다.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겠다던 방침이 오히려 비용을 높여주는 올가미를 만
든 셈이다.
서둘러 가입했던 OECD도 노동법 개정이후를 어렵게 작용하는 또하나의 올
가미처럼 여겨진다. 정부가 어떤 약속을 했기에 공개적 압력을 받아야 하
고 찾아가서 청문회에 답변해야하는 곤욕을 치뤘는지 듣기에도 속이 상한
다.
무엇보다도 중대하고 시급한 현실문제는 기업인의 투자의욕과 성위동기이
다.
한마디로 의욕도 사기도 꺽인 채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궁금하
다. 소문이 무성하던 한보철강이 부도처리되고 제3자인수로 정리되고 있는
전격적인 과정을 보며 재계는 다시 탄식한다.
한보철강은 어떤 과정으로 급속팽창했으며 무엇이 잘못되어 침몰하게 되었
을까. 거액대출을 떠안은 금융권은 어찌되며 자금시장은 얼마큼 심각한 후
유증을 앓게 될 것인가.
모든 것이 걱정이고 불안이며 고비용구조의 조기혁신과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경제가 이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두렵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경제는 분위기와 사기와 신뢰가 좌우한다고 믿어진다. 마음이 편하고
믿을만한 확신이 따를 수 있는 분위기회복이 적자경제를ㄹ 되실리는 응집
력이 될 것이다.
낙망을 재촉하는 시각.
우리경제를 어둡게 보면서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의식과 행동이 반경제로
돌아서고 있다.
국제수지적자 규모를 보고 놀라면서 정부는 대책이 없고 국민은 과소비를
억제하지 못한다.
우리 돈 원화값이 떨어져 환차손이 불어나고 주식값이 폭락하여 평가손에
기관투자가나 개인이 다 망했다고 한탄하면서도 그냥 부잣집처럼 행세한
다.
민심이 집중되는 곳없이 갈기갈기 분산된지는 오래지만 요즘엔 벼슬자리에
앉아있는 관심(官心)도 흩어졌다는 지적이다.
스스로 낙망으로 빠져드는 무책과 무기력이라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크게보아 두자리이다.
대외경쟁력이 너무 많이 떨어진 점이 하나이고 다른 한가지는 경제문제에
관한 논쟁만 거듭했지 근본대책을 추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경제의 특징인 수출력은 잠식되고 수입은 호황이라면 믿을만한 기둥이
무너진 셈이다. 수출은 남는 것이 없고 수입은 높은 마진이 보장되니 자연
히 적자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해외여행수지가 수십억달러나 적자인데도 사치성여행을 말릴 방도가 없다.
유학생 송금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공부는 하지
않고 유랑다니면서 돈만 쓰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라고 한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나 국내에서 안심하고 해볼만한 사업이 없다고들 한
탄한다. 규제가 풀리는가 싶더니만 오히려 강화되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
기도 한다. 경제관계 법령의 기본틀이 바뀌지 않는 한 자유기업주의는 기
대하기 어렵다는 비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처럼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보고 느끼며 쏘아 부치는 말이 옳은 점이 있
다.
그렇지만 너무 우리네 처지를 비하시키며 가망이 없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과거 70년대를 되돌아 보며 오늘의 경제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면 낙망이
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누구나 무섭게 일을 많이 했다. 근검절약은 누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수출은 신명이 나서 열심히 했고 수입은 수지가 잘 맞지 않아서 자제되었
다. 정부는 기업을 우대했고 기업인들에게는 훈장과 표창을 많이 주었었
다.
그때와 지금과는 여건이 다르고 환경도 변했다. 그렇지만 기업의욕이 성취
동기를 유발하고 근검절약이 나라와 가계의 적자를 방어하는 기본원리임에
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마음이 흩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
로 경제를 아끼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도록 독려할 수 있는 방안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는 것이다.
착수는 빠를수록 좋다.
오늘의 시대상황이나 주변환경을 종합하면 우리는 시간과 비용과의 싸움에
잠시 지쳐 있는 꼴이다.
시간은 모자라고 비용은 무거운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지 못
한다.
국가경쟁력이며 수출경쟁력을 따지고 보면 과감한 비용인하가 상책이다.
그러나 무슨 재주로 임금이나 금리를 내리고 물류비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
어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젊은 경제기자시절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을 여러번 취재한 경험이 있다.
반대와 우려가 많았던 경부고속도로는 값싸게 서둘러 건설했다. 그래서 누
더기처럼 뗌질하며 이용하면서 불평도 많이 했다.
그렇지만 후발 개도국들의 교훈이 되고 있는 우리경제의 고성장은 어디서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바로 그 누더기 고속도로였다. 자금은 그때와는
달리 형편이 좋아져서 마음만 먹으면 훌륭한 고속도로를 얼마던지 건설할
수 있다. 항만이나 공항도 건설할 수 있고 댐도 수시로 건설할 수 있을 만
큼 힘이 생겼다.
다만 목돈을 한꺼번에 물어 훌륭한 도로를 건설하여 후세에 남겨주자는 합
의가 어려울 뿐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고속도로 건설비용보다 땅값 보
상비가 더욱 많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류비용을 낮추기 위해 정부예산을 늘리자는 주장이 땅많이 가진 사람들
에게 보상비 많이주는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별도리가 없으니 사회간접자본은 계속 확충해 가야만 한다. 올
예산 10조원이 전년도에 비해 24%나 증가했다니 정부도 충분히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평가한다.
아울러 민자유치사업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총생산(GDP)의
15%가 넘는다는 물류비의 비중을 짧은 기간내에 대폭 인하하자면 정부예산
만으로는 벅차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자유치를 활성화하려면 특혜설을 극
복하고 장사가 될 수 있게 밀어줄 수 밖에 없다. 그 대신 효율과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민간자본이 사회간접자본에 참여할 때 정부와의 효율경쟁의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정부의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민간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올수록 고비용구조의 개선시기가 빨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올해 해양수산부 업무계획을 보니 항만시설의 획기적 확충과 운영체제의
개혁이 올라있다. 신규로 착공하는 항만과 확장하는 항만도 계획되어 예년
보다는 부지런히 서둔다는 느낌이다.
시간이 곧 비용이니 서둘러야 함은 당연하다. 國富를 실어오는 항만 뿐만
아니라 육해운과 통신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둘러져야 할 국책과제들이
다.
우리에게는 고뇌와 사색도 필요하지만 산적한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서둘
러 착수해야 할 시점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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