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화물운송시장이 활성화하려면 완전 개방 수준의 자유화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항공여객시장에 견줘 화물시장의 개방수준이 뒤처지면서 운송량 확대에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와 국토교통부가 개최한 2019 ICAO 항공운송심포지엄&콘퍼런스에서 국제항공화물협회(TIACA) 블라디미르 줍코프 사무총장은 “지난 20년 동안 제7의 자유운수권 등 많은 항공협정이 논의됐지만 항공업계엔 여전히 제약이 많다”며 “국제협정 논의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제한적이고, 항공사들도 많은 관심을 화물보다 여객에 두고 있는 점이 문제다”라고 말했다. 항공자유화협정 제7단계 자유는 상대국에서 국제선 허브 영업이 가능한 권리로, 제3국과 상대국을 오가는 화물 승객 등을 자유롭게 적재·적하할 수 있다.
이날 패널들은 항공화물산업이 활성화하려면 공급을 자유롭게 확대할 수 있도록 당국이 규제완화에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계 국제물류주선업체(포워더)의 연합체인 세계국제물류협회(FIATA) 회장을 지낸 윌리엄 고틸렙은 “세계 교역을 가속화하려면 화물공급을 필요에 따라 확대해야 한다”며 “항공업계가 좀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규제당국에서 자유화 정책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급부상 중인 전자상거래시장에 대비해 항공사들이 수요성장에 걸맞은 공급정책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현재 항공화물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크게 상회하고 있어 이 같은 우려가 시기상조로 여겨지고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에 따르면 지난해 공급성장률(AFTK)은 5.4%, 수요성장률(FTK·톤킬로미터)은 3.5%를 각각 기록했다. 화물적재율도 2017년 대비 0.9%포인트(p) 감소한 49.1%에 머물렀다. 하지만 미중무역분쟁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등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가 수요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점에서 일시적 수요 부진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틸렙은 독일계 의류제조업체 아디다스의 전자상거래시장을 사례로 들며 항공화물시장의 공급확대를 주장했다. 고틸렙은 “(전자상거래) 공급망은 해상운송보다 항공운송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아디다스는 항공공급 차질에 따른 공급망 훼손으로 올해 1분기와 2분기에 2억~4억유로의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주주들에게 알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부 국가들은 자국 항공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공급확대를 반대하고 있다. 가이아나민항청 에그벌트 필드 청장은 “자국 산업 및 국민을 보호하려는 명분으로 일부 국가가 보호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다자간 항공협정을 체결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며 “개방을 통해 자국에게 어떤 점이 도움되는 지를 검토해 올바른 자유화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이 최근 세계 최대 화물기운영사 아틀라스에어와 손잡은 점도 항공화물시장의 우려를 낳고 있다. 아마존은 플랫폼에서 결제된 상품을 자사 항공편으로 운송하는 특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위해 아틀라스에어의 지분을 대거 매입하기도 했다.
아마존의 전자상거래 플랫폼 장악력이 커질수록 수요 증가분이 아마존에 귀속되고 화물기 공급도 덩달아 늘어나게 되다보니, 단순 화물운송만 제공하는 항공사들이 전자상거래 증가에 따른 수혜를 누리기 어려울 수 있다는 분석이다.
국적항공사 보호정책 불공정경쟁 초래
이날 행사에서는 정부의 국적항공사 보호정책이 불공정경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의견도 곳곳에서 제기됐다. 그동안 항공업계는 시장 활성화를 위해 자유화협정 확대에 힘써왔지만 일부 국가의 불공정 지원정책으로 공정경쟁을 실현하지 못했다. 자국항공사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정책, 유동성 위기에 놓인 기업을 정부가 구제금융하는 게 대표적이다.
영국 교통부 마크 보슬리 수석항공서비스정책관은 보호주의 용어로 사용되는 ‘세이프가드’를 반(反)시장적 용어가 아닌 시장경쟁을 유지할 수 있는 상호 호혜적이고 공정한 안심장치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정 항공사가 정부의 각종 혜택에 힘입어 시장을 장악하거나 지배력을 남용해선 안 되기 때문에 세이프가드가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보슬리 정책관은 “국영항공사가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한 보조금에 힘입어 시장지배력을 악용하는 항공사가 잘못된 것이다”라면서도 “일부 도서지역이나 수요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공공서비스 차원에서 항공사 지원에 대한 국가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대학교 이안 더글라스 교수는 ‘공정경쟁’의 정의를 구체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든 항공사를 평준화하는 정책이 아닌 성과가 우수한 항공사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경쟁 환경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공정경쟁 환경 구축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각국의 자국항공사 지원이 금전적으로만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항공사에게 직접 재원을 투입하는 사례 외에도 국가 재원으로 마련된 항공인프라를 사용하거나 부실기업에 대한 정부의 채무보증 등이 불공정경쟁에 해당하는 분석이다.
더글라스 교수는 “국적기에 국가 영웅을 그려 넣는 등 국적기를 가져야 한다는 감성적 호소가 많다”며 “경영에 실패한 국적 대표항공사가 있다면 국민혈세를 투입해 항공사를 구제하는 게 옳은 것일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패널들은 불공정 경쟁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국제적으로 합의된 표준을 항공사들이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보슬리 정책관은 “특정 항공사가 자국 정부의 도움으로 완화된 기준을 적용받으면 불공정한 경쟁우위를 갖게 된다”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에 어긋나면 그에 응당한 규제를 받을 수 있는 안심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동성확보, 해외자본 유치가 해답
항공사들이 유동성을 확보하려면 국가 간 투자나 해외자본 유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그동안 항공사들은 해외자본 유치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소유권과 지배권이 외국인으로 바뀔 수 있고, 국가 안보문제, 외국자본 장악에 따른 자국 항공산업 몰락 등을 우려하는 시각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모의 경제 실현과 국가 간 항공사통합 등이 수시로 이뤄지는 세계항공시장에서 항공업계의 해외자본 유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도 해외자본 유치가 필요하다. 우선 항공연결성을 향상시켜 자국 관광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고, 도시경쟁력도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유동성위기에 놓인 국적항공사에 대한 직접지원이 불공정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큼 민간투자가 최선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영국 교통부 보슬리 정책관은 “과거에는 국가 간 투자에 대해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앞으로는 협조적으로 다가가야 한다”며 “지역통합이라는 큰 틀에서 항공사 간 서로 협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해외자본 유치로 우려되는 소유권과 지배권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캐나다의 의결권제도도 소개됐다. 캐나다 교통국 마크 리우 총재는 “캐나다는 과거부터 국내법에 따라 자국 항공사의 지분 51%와 통제권을 캐나다 국적이 갖도록 제도화했다”고 말했다.
특히 해외자본을 적극 유치하기 위해 외국인에게는 의결권이 없는 주식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지분율을 최대 49%까지 개방했다. 해외 개인투자자와 외항사의 보유지분은 각각 최대 25%로 제한해 경영권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평가다.
아세안지역항공사 설립 논의, 해결과제도 산적
급부상 중인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지역도 국경을 초월한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해외자본의 지분율을 최대 49%까지 허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미얀마 싱가포르 태국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경영진 및 이사 선임 등 경영권은 자국민만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에어아시아 미셸 디 변호사는 “아세안지역 주요 국가들이 경영권은 유지하되, 해외자본의 소유권은 대거 늘리는 등 항공자유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며 “향후 해외자본이 집약된 범공동체적 아세안 기반 항공사의 설립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디 변호사는 대형화되는 항공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국적항공사 대신 아세안지역항공사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기했다. 특정 국가가 아닌 아세안 주요 국가의 허브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항공사를 설립해 해외자본을 대거 유치하는 방식이다.
디 변호사는 “(아세안 기반 항공사는) 자본을 유치하면서 운영효율성을 높일 수 있고 경제적 효용성을 증가시킬 수 있다”며 “네트워크와 기타 항공산업의 추가 투자, 항공연계성 확대, 일자리창출 등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결과제도 있다. 아세안 회원국 1개국 이상이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해야 한다. 일부 회원국은 자국 영공의 항행을 반대할 가능성이 높아 아세안회원국의 동의를 얻어야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다. 국적이 불분명해지는 점도 조항 개정으로 해결돼야 한다.
그는 “아세안지역은 유럽연합(EU)과 달리 초국가적 규제기관이 없어 (아세안) 역외국과 항공협상을 대신할 수 없다”며 “항공사가 설립된다면 아세안지역 내에서만 운항할 거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 류준현 기자 jhryu@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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