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17 09:32
KSG칼럼/무늬만 海技士 평생을 짝퉁으로 살며 얻은 벼슬 “해운계 甘草”
서대남 편집위원
G-5 海運韓國을 돌이켜 보는 추억과 回想의 旅路 - (37)
맨체스터 출신의 ‘팀 이니언’ 제너럴 매니저는 공항에 내릴때부터 축구얘기와 MU(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근황이 늘 화제였다. 하루에 7~8개의 선사를 돌며 필자가 평소 리포팅한 활동결과와 미리 보낸 방문일정에 맞춰 상세한 상담과 질문자료를 준비해 와 치밀하게 접촉하는 공격적인 세일즈가 본받을 만 했고 이는 재직 중 해마다 되풀이 됐다.
싱가포르 본사를 출발, 간단없이 아시아 여러나라를 상황에 따라 무작위로 순회 방문하는 매니저 팀이 한국에 와서 선사를 돌 때는 신설된 선사나 잠정적인 가능성이 보이는 회사 또는 거래가 활발하여 식사나 술 대접이라도 해야 될 곳을 우선적으로 골라서 차별적으로 상담을 벌이는 타임테이블을 필자가 세밀하게 준비해서 사전에 통보하게 돼 있었다.
1年2회 BLA본사 메니저와 3일씩 거래처 50社 직접방문
며칠간 신경을 곤두세워 가며 신설된 선사는 상견례 겸 거래를 트기 위해, 거래 기미가 보이는 곳은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주로 점심약속을 했다. 기존 거래처로 확실히 잡아 둬야 할 곳이라면 대포라도 나누며 깊은 언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저녁시간을 잡아 밤 늦게까지 술잔을 나누기도 하는 참으로 힘든 강행군을 해야만 했었다. 우선 을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스케줄에 맞춰 겨우 3일간에 걸쳐 크게 반기지도 않는 25개 선사 이상을 시간대에 맞춰 방문스케줄을 확정시킨다는 것은 실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택시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다니며 서울 전역과 경기일원을 방문해서 벤라인을 소개하고 각국별 항만별 현지 사정까지를 곁들여 설명하고 묻는 말에 유익한 회답을 즉석에서 준다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워크홀릭에 걸린 일 중독자같이 잠시의 여유스러움도 보이지 않고 타이트하게 짜여진 일정을 안내하는 필자의 의도대로 빈틈없이 소화해 내는 팀 매니저의 업무태도는 실로 놀랄노짜가 아닐수 없었다. 해외출장의 경우 핵심적인 업무가 끝나면 느슨해지기 일쑤고 으레 한숨 돌리며 술집을 찾거나 시티투어나 쇼핑이라도 즐기는 한국 샐러리맨들의 해외출장에 견주면 냉혈적(?)이라 할 만큼 바다 건너 와서도 오로지 일 밖에 모르는 드라이 하기 이를 데 없는 필자의 본사 직속상관이었던 것이다.
가끔, 아니 제법 자주 거래처와의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가서는 옛부터 알던 경영층을 만날때는 식사메뉴 외에 2~3차에 걸쳐 젊은이 전용 카페까지 가서 되레 거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역시 장사꾼들에겐 내 물건을 사주는 고객이 최고로 예쁜 법일진데 더러는 겉과 속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방문판매하는 친한 친구가 별로 필요치 않은 상품을 사달라고 조르면 차라리 술 한잔 사주며 떼우고 마는 경우와 비슷한 것 같아 취중에 웃고 떠들면서도 한편 섭섭할 적이 있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은 오래 기억되는 법. 그래도 때때로 싱가포르 본사 주최로 벤라인 소속 15개국과 유럽주재 마케팅 레프들을 불러 모아 대형 호텔 컨퍼런스 룸에서 시장개척 및 정보를 교환하는 단합대회를 개최할 때는 초청받은 벤라인 가족들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열띤 토론을 벌인 후 리셉션 장에서 저마다 샴페인 잔을 들고 “브라보 벤라인!”을 외칠 땐 보람도 컸었다.
本社서 각국 레프들 매년 초청, 시장개척·정보교환 단합대회
한편 싱가포르의 역사를 일별해 보면 19세기 초까지는 줄곧 네덜란드 영향하에 있다가 1819년부터 영국이 본격 개발에 착수한 이래 ’42~’45년까지 잠시 일본에 점령당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2차대전 후에도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그후 1958년에 자치권을 획득하기는 했으나 63년에는 말레이시아와 잠시 연방체제를 결성했다가 65년에 들어서는 다시 말련(馬聯)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현재의 도시국가 싱가포르가 탄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9년부터 리콴유(李光耀)가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여 사람이 중요자원이라는 인식을 기초로 32년간 영어교육을 중심으로 자원이 없는 섬나라 싱가포르는 국가존립 전략으로 물류중계지로서의 자유무역항 기능의 확대, 금융자본 유치로 국제금융시장의 중심 역할, 다양한 명소 개발과 관광입국의 기치 아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다방면에 걸쳐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은 녹색전원 도시국가로 건물과 거리와 수목들이 가히 환상적인 지상의 낙원을 이뤘다는 칭송과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남국의 정서 무르녹는 거대한 관광리조트 센토사섬(Sentosa Island)을 비롯하여, 이국적이고도 개성넘치는 화려하고도 멋진 세계적 휴양지 빈탄섬 (Bintan Island)과 오차드로드, 차이나타운 그리고 다리 하나 건너면 옆집 같은 이슬람 문화와 말레이 풍속이 짙게 남아 있는 조호바루와 포트켈랑등의 항만을 단숨에 구경할 수가 있었다. 갈 때마다 대개 ISA상운의 조병준 사장이나 J전무이사와 동행을 했고 참석때 마다 비영어권 아시아 지역에서 마치 영어의 본토 런던의 IMO(국제해사기구)총회에 참석한 것 같이 영어가 유창하게 구사되는 현실에서는 필자로선 늘 ‘원더풀’을 연발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南國정서 무르녹는 Sentosa, 시푸드 Riverside 珍味는 일품
그리고 매번 행사의 마지막 날 밤에는 참가자 전원이 리무진 버스에 실려 싱가포르와 각종 중국요리 외에도 시푸드로 유명한 ‘점보 시푸드 리버사이드’나 ‘캐피틀 레스토랑’을 찾았다. 벤라인 가족의 단합을 과시하며 동질감과 우정을 다지던 함성은 아열대 지방의 은빛 바다와 윤슬의 편린이 무리짓는 밤의 낭만과 황홀감을 만끽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지금도 생각사록 아련한 추억으로 눈가를 스쳐 지나간다.
한편 2004년 들어 우리 해운업계는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맞게 되었다. 해운시장 호황이 상당기간 계속되어 외항선사들은 경영수지를 크게 개선하고 해운업의 국민호응도 상당히 높아졌고 상장기업들은 큰 폭 주가상승 경향을 보였다.
선주협회는 1월15일 개최된 정기총회에서 전년도에 회장 직무대리로 추대했던 장두찬 KSS해운 사장을 제25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수석부회장에는 한진해운 최원표사장 그리고 현대상선 노정익사장, 범양상선 장진원사장, 흥아해운 이윤재회장이 유임되고 대한해운 이진방사장, SK해운 이정화사장, 고려해운 최영후사장 등 젊은 층이 신규로 회장단에 입성했다. 감사로는 이치암 동진상선 부사장은 유임하고 부관훼리 한도용 부사장을 새로 선출했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장회장은 정보장교 출신으로 KSS해운 창업자 박종규 회장과 같이 동사 경영 참여와 함께 협회의 운영에도 깊이 간여해온 해운애호가로 늘 눈웃음과 미소띤 홍안에다 입담이 좋아 좌중을 웃기는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매사에 용의주도하고 세밀하며 업무처리도 디테일까지 챙기는 차근차근형에 호연지기가 돋보이는 강직 스타일이었다.
몇 년 전 법정관리에서 벗어나 은행관리하에 있던 범양상선도 새 주인을 찾았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에너지산업과 조선업에 주력해온 낯선 STX그룹(대표 강덕수)이 범양상선을 인수하여 ‘STX팬오션’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출발 한 것이다. 어느 재벌, 어떤 그룹, 무슨 선사다 하며 해운계 초미의 관심사로 범양상선의 행방을 점치던 무성한 추측들과는 빗나간 뜻밖의 다크호스였다. 흥아해운(대표 이윤재)도 무려 19년만에 법정관리란 긴 터널의 어둡던 과거를 마감하고 옛명예를 되찾아 외항해운의 변화된 새로운 약진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협회 회원사도 인터해운(대표 이용배), 대우로지스틱스(대표 안용남), SW해운(대표 김경득), 한성라인(대표 고순영), 국민비투맨(대표 박태룡), TPC코리아(대표 정신종) 등이 신규 회원사로 가입하여 50개사로 늘었다. 총 보유 선복량도 401척 1,259만톤에 달해 괄목할 호황국면을 반영, 전년비 한해에 173만톤이나 증가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던 것이다.
선사별로는 한진해운 46척 263만톤, 현대상선 37척 259만톤, STX팬오션 47척 155만톤, SK해운 15척 151만톤, 대한해운 17척 110만톤으로 빅5로 일컫는 5대선사의 보유량이 전체 선대의 74.4%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상물동량도 전년보다 26.8%나 증가한 7억4,363만톤이나 됐고 이 중 1억2,362만톤을 우리배로 실어 날라 16.6%의 국적선 적취율을 시현하며 214억달러란 급격한 운임수입의 증가를 기록했다.
한국해운 黃金期 ’04년, 船腹 1,260만톤 運賃 214억弗 기록
벤라인 필자의 파트너가 내한, 업무와는 별도 스케줄로 선주협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환담중에 “요즈음 해운경기가 어떠하냐?”는 질문에 당시 박찬재 전무이사의 “그런대로 괜찮다”는 대답이 바로 한국해운 60년사에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사 알고보니 약간은 황당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로 그 때가 그렇게도 좋을 때 였다니?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못 본 그 꽃” 가끔 애송하는 일초(一超) 고은태(高銀泰)시인의 15자짜리 시 ‘그 꽃’은 분명 다른 의미로 쓰였겠지만 본고에서 수차 전술한 바와 같이 필자는 수송실적 및 운임수입과 경영실적의 통계와 평가를 담당하는 조사부장 출신인데다가 그 주위에서 늘 이를 관심있게 지켜보며 남다른 입장을 견지해온 터인데도 해운계와의 인연을 다하고 내려가는 고희의 이 순간에야 해운시황을 깨닫다니 필자는 분명 “보는 눈이 짧아 슬픈 짐승”(?)이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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