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이집트 수에즈운하가 대형컨테이너선 좌초로 가로막힌 지 6일 만에 뚫렸다.
글로벌 해운물류시장은 통항 재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세계 교역량의 약 12%를 담당하는 운하가 막히면서 운송 지연과 화물 적체 등의 후폭풍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납기 지연에 따른 피해 규모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보험금 지급과 손해배상 여부를 놓고도 공방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고 원인에 선박 결함도 배제 못해
지난 3월29일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은 운하를 가로막고 있던 <에버기븐>호의 선체가 완전히 부양하는데 성공하면서 통항을 재개한다고 밝혔다. 운하청과 구난업체는 수심이 높아지는 만조 때 준설 작업을 지속적으로 벌여 사고 선박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다만 선박 인양엔 성공했지만 당분간은 물류 차질이 불가피할 거란 게 해운업계의 중론이다. 세계 7위 선사인 에버그린이 일본 선주사인 쇼에이기센에서 용선한 2만TEU급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는 지난 2018년 9월 이마바리조선소에서 지어졌다. 선적국은 파나마다. 중국에서 출발해 네덜란드로 향하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지난달 23일 수에즈운하에서 좌초됐다.
선사 측은 좌초 원인과 관련해 “사고 당시 풍속 25노트의 돌풍이 발생해 선박이 방향성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강풍의 영향으로 선박의 속도가 13노트를 기록, 수에즈 통항 권장 속도인 8.6노트를 크게 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SCA 측은 당초 모래 폭풍과 강풍을 원인으로 꼽았다가 사람 실수나 선박 결함이 원인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 밖에 이번 사고가 도선사나 선장의 과실로 발생했을 거란 판단도 나오고 있어 조사 결과에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SCA는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 원인을 찾을 방침”이라고 말하며 사고 원인 조사에 나섰다. 선박의 기술관리를 맡고 있는 버나드슐테선박관리(BSM)도 “사고 선박을 대상으로 점검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물류정상화 수주 걸려” 유럽항로 악화일로
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운하가 막히자 글로벌 해운물류시장은 요동쳤다. 운하를 통항하는 선박은 컨테이너선뿐만 아니라 벌크선 탱크선 가스선 등 다양하다. 물류 차질이 한 선종에 그치지 않아 피해가 일파만파 커졌다.
SCA에 따르면 수에즈운하로 연간 1만8000척이 항행하며, 1일 평균 척수는 50척에 달한다. 2019년 선종별 운하 통항량은 컨테이너선 5375척, 탱크선 5163척,벌크선 4200척으로 전체의 약 80%를 차지했다.
사고 당시 수에즈운하에서 대기 중인 선박은 300척 정도였고 150척 이상이 운하를 향해 출항한 것으로 조사됐다. 500척 가까운 선박이 심각한 물류 차질을 빚었음을 알 수 있다. 선사 관계자는 “운하 통항을 기다리는 선박이 상당해 물류 지연이 몇 주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항만 적체로 이미 스케줄 지연이 만성화된 유럽 컨테이너항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NH투자증권 정연승 애널리스트는 통항 중단에 일시적인 선복 부족으로 아시아발 유럽행 컨테이너 운임이 상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에버기븐> 좌초 이후 4주 연속 하락세를 보이던 북유럽행 운임은 1주 만에 상승세로 돌아섰다. 상하이해운거래소에 따르면 3월26일자 상하이발 북유럽행 운임은 20피트 컨테이너(TEU)당 3742달러를 기록, 전주 3665달러에서 2.1% 올랐다.
수에즈운하 사태는 북미항로에도 영향을 미친다. 스케줄 지연으로 유럽에서 들여오는 공컨테이너 회수 기간이 길어지면서 중국 등 아시아지역에서 북미 수출에 필요한 화물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정 애널리스트는 “이번 사태로 유럽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 혼란이 가중되고 기업들의 재고관리 중요성이 재차 높아질 전망”이라며 “실제로2020년4분기 미국 서안을 중심으로 극심한 항만 혼잡과 컨테이너 박스 부족으로 상품 판매에 차질이 발생한 기업들이 다수 있었다”고 말했다.
벌크선과 탱크선도 시황이 급등하는 등 수에즈운하발 후폭풍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운항 차질로 운임과 원자재 가격도 상승할 가능성이 커 화주들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LR1~2급 제품운반선은 가스 석유 나프타 등의 수송이 활발해지면서 시황이 상승세를 보이던 중이었다. 모두 수에즈운하를 경유하기 때문에 중동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선박이 많았다.하지만 이번 사고로 체선이 발생하면서 용선료 상승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선사 관계자는 “일부 선박이 중동에서 희망봉을 경유해 톤마일(수송거리)이 상당히 증가하면서 운임 급등 등시장에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에즈운하 통항 제한에 가장 영향을 받은 선종이 컨테이너선과 탱크선이란 분석도 나왔다.
해양진흥공사는 운하 통항수 기준 1~2위인 컨테이너선과 유조선이 운하 통항 지제 장기화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선종으로 꼽았다. 사고 이후 원유 수송 차질 우려로 국제유가가 급등한 데다 글로벌 컨테이너 물동량 중 약 30%가 수에즈운하를 거친다는 이유에서다.
액화천연가스(LNG)선과 자동차선도 통항 제한이 길어지면서 수송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벌크선은 선대 규모 대비 통항 횟수가 낮은 편이라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할 것으로 내다봤다.
선박이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하며 운항 거리가 늘어나면서 컨테이너선사들의 연료비 부담도 커지는 데다 화주들의 납기 대란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HMM은 수에즈운하를 지날 예정이던 2만4000TEU급 < HMM스톡홀름 > < HMM로테르담 > < HMM더블린 > 3척과 5000TEU급 < HMM프레스티지 > 1척 등 총 4척이 희망봉 방면으로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HMM이 희망봉 노선을 경유하는 건 지난 1975년 이후 46년 만이다. 희망봉 우회는 수에즈운하를 경유하는 것과 비교해 5~7일 정도 항해 시간이 늘어난다. 이 밖에 머스크 CMA-CGM MSC 양밍해운 ONE 등의 일부 선박도 희망봉 노선을 선택했다.
선박 인양·수리 비용 선주 부담
<에버기븐>의 인양이 이뤄지면서 책임 소재를 놓고 공방이 벌어질 전망이다. 이번 사고원인 결과에 따라 운하를 운영하는 이집트 정부와 통항 지연으로 피해를 본 선사와 선주, 그리고 보험사의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 로이즈리스트는 이번 사고로 화물 운송이 지연되면서 입은 피해는 시간당 4억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하루 96억달러(약 11조원), 일주일이면 672억달러(약 77조원)에 이른다.
<에버기븐>의 보험사인 영국 UK P&I클럽은 성명을 통해 선주인 쇼에이기센이 기반시설 손상이나 방해로 발생한 손실과 관련한 특정 제3자 책임보험에 가입돼 있다고 밝혔다.
통상 좌초 선박 인양에 드는 비용이나 선박 수리 비용은 조선소의 과실 유무에 상관없이 선주가 부담할 가능성이 높다.인양 비용도 선주가 일반적으로 지불하는 데 미뤄 이번 사고로 엄청난 규모의 해상 보험금이 청구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이번 사고가 매우 큰 규모이긴 하지만 보험사의 신용등급 약화를 불러오진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운송 지연으로 피해를 본 다른 배에 실린 화물 소유주들이 배상을 청구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책임 소재를 놓고 적지 않은 신경전이 벌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좌초 사고로 일본 조선업계를 향한 국제사회의 불신도 고개를 들 전망이다. 사고 원인이 선박 결함으로 결론날 경우 일본 1위 조선소의 위상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세계 1~2위인 한국 중국 조선업 타도에 나선 일본으로선 이번 사고가 당황스러울 밖에 없는 셈이다.
이마바리조선소는 지난달 26일 연 기자간담회에서 “선체 결함과 선원의 실수가 아닌 모래폭풍일 가능성이 있지만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 기름 유출 등 누수와 과적이 없었던 데다 선박의 방향타와 프로펠러 등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덧붙였다.
선박 소유주인 쇼에이기센도 같은 날 “수에즈운하에서 선박 통항에 차질이 빚어져 여러 관계자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친 점을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중국 선박이 초대형선 건조 시장에서 잦은 고장으로 경쟁력을 잃은 데다 일본에서 지어진 선박마저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서 기술력이 우수한 한국조선이 향후 반사이익을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일각에서는 에버그린이 삼성중공업에 1만5000TEU급 20척 전량을 발주한 배경에 이번 사고가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고 한 달 전 외신에선 에버그린이 직접 삼성중공업과 후둥중화조선에서 각각 5척씩 짓고, 일본 선주사인 쇼에이기센에서 용선하는 방식으로 이마바리조선에 10척을 발주한다는 구체적인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 최성훈 기자 shchoi@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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