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사장님, 회사에서 전화 왔습니다. 받아보세요.”
단골 커피숍의 아가씨가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마치 7,80년대 다방의 한 장면 같다. 서정민이 휴대폰을 사무실에 두고 온 것이다. 수화기의 음성이 여성답게 차랑했다.
“정부에서 세월호 인양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제세실업 여성 과장의 항의 섞인 말이었다.
“그건 신문에도 났잖아.”
“그게 아니고요, 노르웨이 구조전문회사와 연락해야 하는 것 아녀요?”
제세실업은 세월호 인양과 관련하여 구조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특조위와 합의했다. 회사 기획실장 이순애가 침몰 사고로 희생된 점이 고려되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났을 무렵인 2015년 4월 22일 해수부는 공식 인양 계획을 발표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고 1주기를 앞두고, 실종자 가족과 전문가들의 의견, 여론 등을 수렴해 선체 인양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한 지 며칠 뒤였다. 9명의 미수습자 가족 동의를 얻어 2014년 11월 11일 잠수 수색 종료를 선언한 후 거의 반 년 만이다.
인양을 결심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람들의 머릿속은 세월호 구난활동은 곧 돈 쓰는 일이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소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 수천억을 쓰는 건 ‘세금낭비’고 특조위 활동은 ‘세금 도둑’이란 비난이 쏟아졌다. 이런 분위기 탓에 본격적 인양은 계속 지연됐다. 인양이 지연되자 2015년 1월 26일 ‘온전한 세월호 인양과 실종자 수습 및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한 피해자 가족협의회가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20일간 릴레이 도보 행진을 시작했다.
비용과 기술적 난관 등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사회 통합 차원에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기류가 확산하면서 정부는 선체 인양을 적극 검토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사람의 마음을 사는 데는 겸손이 필수라고 한다. 사고 초기 정부는 단순한 민간인 사고로 넘기려다가 일을 키우고 말았다. 뒤늦게 국민에 대한 겸손이 부족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해수부는 당초 선체를 절단해 인양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해저 47미터 펄 속에 단단히 박힌 배를 건져 올리는 데 이만저만한 어려움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선 배를 끌어올리기 위해 1만3천 톤의 힘이 필요했다. 국내 최대 8천 톤급 크레인이 합동으로 인양작전을 펼쳐야 한다. 물 위로 나오면 플로팅독(floating dock)으로 받쳐서 끌어 올리는 과정도 필요하다. 절단 방식 인양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었다. ‘절단해서 올리면 쉬운데?’ ‘일본에서 세월호와 같은 크기의 선체를 와이어로 절단했다는데?’
하지만 일본 배는 실종자가 없었다는 점이 세월호와 달랐다. 절단해 인양하려는 해수부 계획을 두고 온전한 인양이 진실 규명의 핵심임을 망각한 것이란 비판이 뒤따랐다. 결국 해양수산부 태스크포스 결정은 원형 그대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비용과 시간이 더 들더라도 절단 없이 진행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혔다.
그럼 통째로 배를 들어올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선체에 고리를 만든 뒤 쇠사슬로 묶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쇠사슬은 최고 200톤 무게를 들어 올리니, 1만 톤짜리 세월호를 들려면 최대 100가닥 정도의 인양줄이 필요하군요.”
세월호 인양 입찰 설명회에 참석한 서정민은 비교적 여유를 두고 계산을 했다.
“그래도 작업이 만만치는 않습니다.” 국내 구난업체 간부는 설명했다.
“배의 선수나 선미와 달리 중간 부분은 전복된 배 아래로 들어가야 하는데 잠수사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선체에 3~4미터 간격마다 설치된 브래킷(bracket·보강재)을 활용해 쇠사슬을 거는 방법도 있다. 쇠사슬을 묶은 뒤엔 수면 위에 대기 중인 크레인에 연결하게 된다. 여기에도 난관이 있다. 펄에 단단히 박힌 배를 뽑아내려면 충분한 크기의 크레인을 동원해야 한다.
“이 작업을 할 때도 잠수사의 안전을 위해 시간을 최소로 단축해야 하죠.”
간부는 말하면서, 배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면 플로팅 독을 배 아래로 넣게 된다고 보충 설명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배가 크게 파손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 밖으로 배를 꺼내면 부력과 유속, 파도와 바람 등 주변의 상황이 급격히 달라진다. 이 때문에 크레인과 연결된 쇠줄이 끊어질 수 있고, 심하면 선체가 두 동강 날 수 있다.
마침 옆에 해수부 태스크포스 팀장이 있어 서정민은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그가 물 밖에서 선체가 무거워지는 것을 걱정하자 팀장도 같은 생각을 말했다.
“선체의 물이 어떻게 빠져나가느냐에 따라 무게중심도 갑자기 변할 수 있죠.”
“정교한 작업을 요구하는군요.” 서정민이 수긍했다.
“그래서 물 위에 조금 모습을 드러내면 플로팅독으로 받칩니다.”
“예상 기간과 비용은 어떻습니까?”
“일 년 정도에 일천억 내지 이천억 들죠.”
“막대한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건 불가피하군요.”
“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국민들이 나뉘어져 갈등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경제적인 비용보다 사회적 갈등 비용을 줄인다는 명분이 크죠.”
“정부와 정치권, 실종자 가족이 모두 마음을 열어야 하겠네요.”
“옳은 말씀입니다.”
사실 세월호가 침몰 직후 해저에 옆으로 드러눕자 즉각 인양하자는 의견이 대두된 적이 있었다. 당시 실제로 크레인선과 예인선, 운영인력 30여 명이 한 팀을 이뤄 현장에 급파되었다. 하지만 그때 한 전문가가 의문을 던졌다.
“세월호는 화물 과적에다 이미 물이 가득 차 하중이 1만 톤 이상일 텐데 인양이 가능할까요?”
인양팀장은 주저 없이 자기주장을 개진했다.
“일단 해보는 겁니다.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면 실종자 가족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팀장은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미 도착한 4개 크레인선의 총 인양능력이 9천 톤이고 여기에 이틀 후 합류할 삼성5호(8천 톤급)까지 합치면 1만7천 톤까지 늘어나 충분히 가능하다는 의견을 냈다.
반면 고려해야할 사항으로 네 가지가 제시됐다.
- 선체가 기울어 있는 점
- 선내 침수로 인해 증가된 무게
- 사고해역의 빠른 조류와 깊은 수심
- 국내에서 이만한 하중의 선체를 인양한 경험이 전혀 없다는 점
인양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은 백가쟁명식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선내 에어포켓과 생존자들의 상황 등을 감안하면 작업 시도 자체가 쉽지 않다는 의견부터, 해류의 변화와 선체의 침수각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어 인양이 쉽지 않다는 의견, 초기에는 인양보다는 잠수부를 통한 선내 수색에 치중해야 한다는 의견 들이 쏟아졌다.
결국 크레인은 선내 공기주입이 용이하도록 구조작업을 보조하는 용도로 활용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내부에 갇힌 인원의 생사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인양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수색 작업이 길어지면서 에어포켓의 생존 한계인 72시간이 지나고 기상 악화까지 겹쳐 사고 발생 열흘 후 크레인 팀은 철수했다.
해수부에 인양을 고의 지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의 화살이 날아들기도 했다. 해수부는 참사가 난 지 한 달쯤 지나 이미 유력한 선체 인양방식을 내부적으로 정해 놓고도 수중수색 중단 이후 인양 가능성을 검토하겠다며 5개월을 그냥 흘려보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해수부의 의견은 달랐다.
“영국 TMC의 보고서와 국내외 7개 인양업체의 기술제안서가 제시한 인양방식은 단지 아이디어 차원일 뿐입니다.”
선체처리기술검토팀의 활동에 소요된 5개월은 선체를 제대로 들어 올릴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명도 설득력은 떨어졌다. 2015년 4월 기술검토팀이 제안한 선체 부양 방식은 선체 표면의 93개 지점을 크레인에 연결해 들어올리는 것이었지만, 석 달 뒤 인양업체로 선정된 상하이샐비지가 제시한 방식은 선체 밑으로 24개의 철제빔을 끼워넣고 선내에는 보조부력재를 넣어 부양시키는 방식이었다. 기술검토팀이 수개월에 걸쳐 연구한 방식을 인양업체는 채택하지 않은 것이다.
기술검토 당시 영국 TMC가 ‘인양 준비에서 완료까지 인양 솔루션을 제공하고, 입찰 과정에서 계약조건과 방법, 비용을 검토하는 것은 물론, 실제 인양작업에서 감리와 감독 역할’까지 맡는다고 한 정부 내부 문건도 의구심을 키웠다. 실제로 TMC는 상하이샐비지의 인양작업 현장에서도 감리역할을 맡았다.
기존 언론보다 특종 보도를 더 많이 쏟아내는 뉴스타파는 이렇게 폭로했다. “공개되지 않은 TMC 보고서는, 참사 후 즉시 인양방식으로 선체를 해저면에서 5~10미터 들어올려 잠수바지(플로팅독)에 실은 뒤 수심 30미터 이내인 동거차도 남단으로 이동시켜 수면 위로 완전히 부상시킨다’는 내용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일 년 후 해수부가 발표한 유력 인양방식과 판박이처럼 같은 것입니다.” 정부가 고의적으로 인양을 미적거린 사연이라는 것이다.
해수부는 여러 논란 끝에 인양업체 입찰을 진행했다. 해수부는 2015년 5월 선체 인양 입찰 설명회를 하고 6월 입찰에 들어가 7월 평가에 들어갔다. 27개 업체가 7개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참여했다. 국내외 업체 간 컨소시엄 5개, 국내업체 간 컨소시엄 2개였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외국업체는 미국 2곳, 네덜란드 1곳, 덴마크 1곳, 중국 2곳이었다.
응찰기업을 심사하는 평가위원은 잠수, 선체구조, 장비 등 분야별 내외부 전문가로 구성됐다. 이들은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2일간 합숙을 하며 업체별 제안서 발표, 토론 및 평가서 등의 기술평가를 진행했다.
기술평가 90퍼센트, 가격점수 10퍼센트의 비율로 진행된 입찰평가절차를 거쳐 중국의 상하이샐비지가 종합평점 88점으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국내 업체 ‘오션씨앤아이’가 지분율 30퍼센트로 참여했다. 정부는 2주간의 협상을 마치고 중국업체와 2015년 8월 세월호 인양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두고 일본은 ‘하필 중국 기업인가?’ ‘싼 게 비지떡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야유했다.
상하이샐비지는 1951년 설립된 중국 교통운수부 산하 국영기업으로, 잠수사 등 구난 전문인력 1,400명가량 보유하고 있고 연매출 3,000억 원을 내는 대형 해양 구난업체다. 1,900건 이상의 선박 구조 경험이 있는 이 회사가 실제 선체를 어떻게 인양할지 국민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상하이샐비지가 정부에 제안한 내용은 이랬다.
- 인양비용 916억 원
- 현장에 350명 3교대 근무
- 선체 밑바닥에 24개 철판을 깐다.
- 뱃머리를 5도 정도 들어 올린다.
- 평형수, 저장고 물을 빼고 공기 주입 또는 부력재를 넣는다.
- 1만 톤과 8천 톤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다.
하지만 크레인 두 대로 선체를 들어서 잠수바지에 실어 올리는 방식은 실패하고 말았다.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맹골수도에 가라앉은 길이 146미터 크기의 세월호를 끌어올리는 일은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 세월호 내부 탱크에 공기를 넣고 외부에 에어백 등을 설치해 부력을 확보한 뒤 해상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플로팅독에 싣는 인양 방식을 추진했으나 1년여 동안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16년 6월 12일 인양 도중 선수 들기 작업을 하다가 선수를 지탱하던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선체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골조 빔 사이가 터진 것이다.
이에 상하이샐비지는 2016년 11월 인양 방식을 ‘텐덤리프팅’ 방식으로 바꿨다. 크레인 대신 리프팅 빔에 연결된 66개의 인양줄로 선체를 끌어올려 반잠수식 선박에 얹는 방법이다.
인양 방식이 바뀌고 작업이 지연되면서 상하이샐비지의 기술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끊이질 않고 나왔다. 상하이샐비지는 사실 기술평가에서 최고점을 받지 못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곳은 네덜란드 스미트와 국내 파트너 코리아샐비지가 65:35의 출자비율로 손잡은 스미트 컨소시엄이었다. 기술평가점수 81점으로 7개 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80점을 넘겼다. 하지만 이곳은 제안가격의 5퍼센트인 입찰보증금 지급을 제때 하지 않아 종합평점 없이 ‘입찰무효’ 처리됐다.
스미트의 인양 방식은 독특했다. 우선 대형 바지선에 물을 채워 침몰시켜 세월호 선체 옆에 위치시킨 뒤, 선체를 크레인으로 들어 수중에서 바지선 위에 싣는다. 이 과정이 끝나면 바지선에 공기를 주입해 부력으로 수면 위로 띄운다. 세월호는 바지선에 실린 채 거치될 항구까지 이동하게 된다. 동거차도 인근 해역으로 이동시켜 플로팅바지에 싣는 상하이샐비지 방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부력재를 넣기 위해 잠수사가 세월호 선체에 진입하는 과정도 필요 없다.
<이 작품은 세월호 사고의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을 가미한 창작물이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기업 지명 등은 실제와 관련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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