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0 09:44

역사적 위기 속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대응과 교훈

기고/한국해양수산개발원 이성우 본부장


글로벌 해운강국의 재건이라는 기치아래 정부는 2017년 한진해운 도산이후 무너진 한국의 해운업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노력으로 한국해양진흥공사를 2018년 7월에 설립했고 정부가 수립한 ‘해운재건 5개년계획’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국적 원양선사의 글로벌 선사 지위 회복을 노리고 있고 최근 현대상선이 ‘The Alliance’에 가입을 통해 그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또한 중견선사들의 통합을 통한 구조 조정과 비즈니스 모델 강화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 제고도 도모 중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 해운산업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미흡한 점이 많다. 여전히 양적인 성장과 단순한 비즈니스 모델로 해운 운임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해운선사와 달리 4차 산업기술 접목을 통한 비용구조 개선과 부가가치 중심의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 창출에 노력을 기울이는 글로벌 경쟁선사들과 격차가 크지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시점에서 단순히 해운산업이라는 좁은 시각에서 해결방안을 찾기보다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 해운산업이 당시 글로벌 경제와 어떤 관계를 가지면서 성장과 위기를 반복해 왔는지 복기해 보고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향후 거시 관점과 연계해서 어떤 방향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할지 시사점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다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의 근대 해운의 태동은 서구 열강들의 무역개방 요구부터라 할 수 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1876년 부산항을 시작으로 원산항(1880년), 인천항(1883년) 순으로 개항이 이루어졌다. 근대 선박의 최초 도입은 1883년 고종이 지시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영국, 중국(당시 청), 미국, 독일 등의 선박 기항을 허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1886년에는 전운국(轉運局)이 해운을 관장하면서 직영했고 이후 민간기업도 선박을 구입해 해운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의 국권침탈로 일본인만 해운업을 할 수 있게 해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해운권을 상실했었다. 1945년 광복 후 우리나라 수역에 남아있던 선박은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汽船株式會社) 소속 부산호(1631톤) 등 소형선박 163척이 있었다. 광복 당시 일본 해운선사에 근무한 우리 해기사들 중심으로 조선우선주식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우리나라 해운 재건의 시작점이 됐다. 이후 조선우선주식회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1800톤급 미국 전시 선박 6척과 570톤급 선박 6척을 대여 받아 해운기업으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경제자립을 위한 외항 진출과 선박 확충이 중요 과제였다. 당시 우리나라가 보유한 대형 선박은 총 33척이고 이중 민간선박은 조선우선주식회사 6척에 불과했다. 반면 해외원조로 대량의 물자와 소비물자가 수입돼 인천항과 부산항을 중심으로 해상 물동량이 1백만 톤 이상 급증했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무역을 외국 선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책해운회사 설립을 모색했다. 이후 정부는 조선우선주식회사를 국영화하는 방안을 협의했고 1949년 12월 정부의 재원과 조선우선주식회사가 통합돼 우리나라 최초의 국적해운회사인 대한해운공사가 공식 출범했다. 당시 대한해운공사는 1950년 1월 기준 운항 선박 총 25척, 4만3344톤이었다. 대한해운공사 설립은 우리나라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설립된 국적해운회사이며, 민간기업의 외항 진출이 불가능했던 시기에 국제무역 화물을 국적선으로 수송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당시 우리나라 연안항로는 주로 무연탄, 양회를 삼척, 인천, 부산으로 이송하는 것이었고 국제항로는 일본과의 무역이 주였다. 이후 정부차원의 대한해운공사 민영화가 논의됐고 1957년 10월 민영화 법령 마련 이후 오랜 진통 끝에 1968년 11월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됐다. 이 무렵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고 이를 기반으로 우리나라 해운기업들이 일본, 동남아 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해운산업은 1970년대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이후 크게 세 번의 대내외 경제위기와 함께 해운산업의 위기를 겪게 됐다. 세 번의 위기 모두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시작됐으나 그 성격이나 강도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나라 해운산업에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1978년말 발생한 제2차 석유파동이었다. 1973년 일어난 제1차 석유파동은 중동국가들과 이스라엘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시작해 유가 폭등을 촉발했으나 아직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과 수출입 산업 기반이 덜 정비된 상태라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제2차 석유파동은 세계 주요 산유국이었던 이란의 왕정에 대한 혁명으로 인해 발생한 국지적 리스크로 석유가격이 배럴당 10달러대에서 30달러대로 단기간 3배 이상 급등하게 됐다. 당시 전세계는 유가상승과 고금리 체제가 전개되면서 1979년 하반기부터 세계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불황에 빠져들었다. 세계 경제가 침체되면서 해상물동량도 감소했다. 1980년에 전년대비 2.9% 감소하기 시작해 1983년까지 4년 연속 하락하는 상황을 맞았다. 반면 선박공급량은 1982년 하반기부터 1984년 초반까지 공급과잉 상태가 됐고 이로 인해 선복량 과잉이 심각해졌다. 이는 가공무역을 통해 국부를 창출하고자 하는 우리나라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해당 원자재와 수출품을 수송하던 우리나라 해운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당시 1970년대 중반 경제성장에 따른 수출입 물동량의 증가로 정부는 1975년 시행했던 계획조선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정부는 1981년 외항해운업체 대형화 정책을 추진해 선박증강을 지속했는데 이때 해운기업이 1976년 77개에서 1983년 115개사로 증가했고 선복량과 함께 운임수입도 1980년 18억8500만 달러에서 1983년 24억4600만달러로 29.8% 증가했다. 이처럼 외형적 성장을 추구해 온 우리나라 해운은 2차 석유파동에 기인한 세계 해운업의 불황으로 1982년부터 심각한 위기를 맞았고 고가로 구입한 선대구성과 국내 선사 간 과당경쟁으로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결국 우리나라 해운업계는 1982년 당시 기준 1024억원의 엄청난 적자를 기록했고 구입 선박의 원리금 상환 부담으로 일부 선사들은 도산했다.

당시 정부는 해운기업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해운산업 뿐만 아니라 금융권 등 국민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해 1983년 10월 7일 경제장관회의에서 ‘해운산업육성대책’을 수립했다. 정부 대책은 다수의 선사 간 과당경쟁으로 해운시황이 회복되더라도 해운업 재건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해운산업을 ‘합리화 대상기업’으로 지정해 선사 통합을 유도하는 해운산업 합리화 조치를 추진했다. 이 조치로 기존 63개 선사가 원양항로 8개 그룹, 동남아항로 4개 그룹, 한일항로 4개 그룹, 특수선 그룹 등 17개 그룹의 선사로 정비됐다. 당시는 아직 세계 국제관계와 무역규범이 확정돼 있지 않아서 우리나라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했었다. 한편 기회도 찾아와서 1984년 미국의 해운법 개정 이후 세계 컨테이너 시장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한 결과 선진국이 지배해 온 원양 정기선 시장에서 선진국의 세력이 위축되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해운기업들이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 기간 중 대한해운공사가 재무구조 악화로 한진해운에 흡수합병 됐으며, 고려해운이 해운불황으로 원양부문을 현대상선에 양도함으로써 현대상선도 글로벌 해운선사로 발돋움하게 됐다. 한편, 1990년대 들어 글로벌화, 포스터 모더니즘의 확대, 교통통신 혁명 등이 확산되면서 해운 서비스의 사업범위가 글로벌 시장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글로벌 수요증대와 부진의 흐름 속에서 글로벌 해운선사들은 M&A와 같은 범위와 규모 확대 전략을 추진했고 동종 업체들과의 얼라이언스를 통한 비용절감과 네트워크 확대 전략을 구사했다.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두 번째 위기는 1997년 하반기 아시아 금융위기를 통해서 찾아왔다. IMF외환위기라 통칭되는 위기는 시작은 동남아 국가였으나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 사건이다. 1985년 미일간 플라자합의로 엔고가 지속되면서 우리나라 경제에 호기가 왔고 이에 자신감을 가진 우리나라 정부는 OECD 가입, 적극적인 환율 정책, 기업들의 차입범위 확대 등을 허용하다가 위기관리 부재로 역풍을 맞아 다수의 국내 굴지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고 엄청난 국부가 유출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전반적인 국제 경기의 악화와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에 따라 자금사정이 악화돼 수출입 해상물동량이 감소하고 결국 해운업의 수익성 감소로 이어졌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에 의해 국가재정 관리를 받게 됐고 IMF의 권고로 한국 금융기관들이 모든 기업들에게 부채비율 200%이하로 요구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해운기업들도 동일 기준 아래 구조조정에 직면하게 됐다. 현대상선은 IMF 관리체제 이후 자금 유동성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유동성 위기에 따른 경영난을 해결하기 위해 주요 자산들을 매각했다. 한진해운은 유동성 위기에 봉착하지는 않았으나 정부의 부채 비율 방침에 따라 다수의 선박을 매각했다. 2004년 말 우리나라 해운 14개 선사가 총 97척에 총톤수 200만7132톤을 운항했는데, 이들 선박의 적재능력은 총 16만5669TEU이다. 1996년과 비교했을 때 보유 총톤수는 36.4%가 축소됐다. 사실상 우리나라 국적 선사의 컨테이너선 운항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1996년까지 유지됐던 피더선 운항에서 탈피해 기간항로 컨테이너 정기선 시장으로 체질 개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2000년대 초중반 국내 해운기업들의 큰 성장을 이루었는데 한진해운은 2000년 1월 24만4636TEU로 세계 전체 선복량 4위, 현대상선은 2000년 10만2314TEU를 보유해 세계 15위를 기록했다. 이 기간 중 조양상선이 파산했고,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IMF 관리체제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해 성장이 둔화됐다. 2000년대 이후부터 글로벌 물류시장은 화주의 요구에 따른 종합 물류서비스 제공 및 IT기술을 이용한 정보시스템 구축 등이 필요하게 돼 운송 위주의 해운기업들도 종합화와 통합화 흐름에 맞추어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우리나라 해운기업들과의 얼라이언스 뿐만 아니라 전자상거래 기업, 인터넷 포탈기업, 정보기업 들과의 제휴를 통한 사업범위 확대와 비용 절감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당시 한진해운은 터미널 운영과 IT분야로의 수익원 다각화를 모색했고 2000년 해운항만물류 IT전담 법인을 설립했다. 현대상선은 현대로지스틱스를 설립하고 해상운송에서 육상운송까지 물류서비스의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3번째 위기는 2008년 찾아온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시작됐다. 미국에서 시작된 모기지 금융 위기는 전세계 경제를 10년간 저성장 상황으로 몰아갔고 최근 미국 중심의 경제성장을 위한 지나친 독주 정책으로 미중 무역갈등이 시발점이 돼 아직도 글로벌 경제와 무역환경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상황이다. 2000년대 초중반 우리나라 외항 선박은 1372만 톤으로 당시 세계 상선대의 약 2.2%를 차지하는 세계 8위였다. 우리나라보다 많은 선복량을 보유한 국가는 그리스, 일본, 독일, 미국, 중국, 노르웨이, 홍콩 정도로 여전히 서유럽의 전통적인 해운국가들이 선복량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해운기업은 2004년 73개에서 2008년 177개로 늘어났고 선박 보유척수도 471척에서 819척으로 늘어나 규모면에서 크게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성장이 2008년부터 닥쳐 온 위기상황에 더욱 대응하기가 어려워지는 원인이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2008년 5월 20일 해운운임지수인 BDI가 1만1793point였던 것이 동년 하반기에 663point로 급락하면서 글로벌 해운시작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해운시장에 악영향을 주었다. 호황기 선박을 다수 용선한 선사들은 물론이고, 이 선박을 재용선(Sales & Lease Back)한 중소형 선사들이 유동성 악화로 용선료를 지금하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2008년 말 당시 외항해운선사가 조선소에 발주해 건조 중인 선박은 모두 293척으로 선가는 200억 달러를 웃돌아 국내 해운산업 위기의 주요 요인이 됐다. 선사들은 금융위기로 인해 자금조달이 어려워지고 운임하락으로 수익이 적자로 전환되면서 선가도 급락하는 악순환 구조가 해운기업들에 닥치게 된 것이다. 다수의 국적 해운 기업들이 2008년 이후 대부분 비슷한 이유로 도산했다. 이러한 형태는 과거 두 차례의 해운위기에서 일어났던 상황과 거의 흡사하다. 우리나라 최대 해운선사였던 한진해운의 도산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2008년 호황기를 구가했던 한진해운을 포함한 우리 선사들은 미래 시장을 낙관했고 고가의 장기용선과 무리한 사업 확장을 한 것이다. 반면 2008년 이후 경제위기로 글로벌 교역량이 줄면서 해운운임이 급락하게 되고 고비용과 저수입 구조가 맞물리면서 한진해운은 어려운 경영상황에 놓이게 됐다. 결국 한진해운의 채권단이 2016년 4월 공동관리(자율협약) 신청을 시작하게 됐고 5월 4일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담보로 사채권자의 부채를 연장 승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수익이 건전한 사업부분은 매각하고 수익구조가 불량 사업부분은 그대로 두게 되는 악순환을 낳게 되는 것이다. 한진해운은 다양한 자구책을 내놓고 노력을 했으나 동년 8월 30일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 해운선사와 같이 신용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의 경우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순간 화주 및 사업 파트너 이탈 등으로 파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진해운 역시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순간, 심각한 영업상 문제가 대두되면서 2017년 2월 17일 파산하게 됐다. 이로 인해 1977년 설립됐던 한진해운의 40년 역사를 마무리하고 공중분해 됐다. 한진해운의 파산 과정은 다음 표와 같다.
 


한편 우리나라 정부는 해운위기 때마다 다른 형태의 정책을 통해 국적 해운기업을 지원하고자 노력했다. 1970년대 해운위기 때는 정부주도의 해운기업 통폐합, 조세 감면 및 금융 지원 등 직접적인 지원 정책을 펼쳤다. 이후 1997년 위기 시에는 구조조정을 담보로 하는 직접 금융지원 정책을 펼쳤으나 2008년 이후의 위기에서는 그 대응 방법을 바꿔 간접형태의 지원책으로 전환했다. 2009년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 선박 펀드 운영을 통해 2014년까지 총 33척, 4700억원의 중고선박 매입 프로그램을 운영해 해운기업들에게 민간자금을 간접적인 형태로 지원했다. 2013년 회사채 시장 정상화 지원으로 대형선사를 위한 회사채의 인수제도를 도입됐고 총 1조 6580억원을 지원했으며 중소선사 19개 기업도 1300억원을 지원했으나 높은 상환비율 및 고금리로 경영여건은 더욱 악화됐다. 이후 선박금융을 위한 지원을 확대했으며 2014년 해양금융종합센터, 2015년 한국해양보증보험을 설립하는 등 해운산업 및 기업을 위한 다양한 지원방안을 강구했으나 해운산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금융상품의 이용조건 등으로 인해 다수의 국적선사들이 도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일부 관계자들은 시장논리에 의한 당연한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 과정이라는 당위론과 함께 일부는 정부의 정책 실패라는 비판론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해운산업의 불황에 대비하고자 한국해운진흥공사를 설립해 적극적인 대응하고 있다. 과거 정부의 해운금융지원이 구제금융을 위한 단기간, 한시적 지원이라면 지금의 지원정책은 전담기구를 통해 장기적으로 기업맞춤형 금융제도를 제공 중에 있다. 해운기업의 투자지원, 보증지원, 정책지원, 경영지원 등 광범위하고 지속가능한 지원책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흐름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위기는 과거와 많이 다르다. 우선 세계 경제위기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이고 이 위기가 미중 무역 및 환율갈등, 한일 무역갈등으로 리스크가 증폭되고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는 중동의 유가 폭등으로 인한 금융위기, 아시아 환율 관리 부족과 부채 증가로 인한 경제위기 등과 달리 미국에서 시작된 이번 금융위기는 지속성과 함께 당사자인 미국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국가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형태로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이 시점에 과연 우리나라 해운산업이 기존 위기들에서 학습한 방식으로 해운산업 재건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다.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물안의 개구리가 아니라 넓게 본다면 예측의 가능성도 높이고 리스크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지금 해운업이라는 좁은 분야에서 해답을 찾으러 하지 말고 거시적 경제관점과 요동치는 국제적 정치갈등 구조를 제대로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살아나갈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부와 한국해운진흥공사가 추진하는 해운산업 재건에 대한 주요 정책들을 한번 더 넓은 관점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분석하고 토론을 해 재조명하고 방향을 새롭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 물류와 경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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