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해운재건을 선포한 지 2년차를 맞는 가운데 우리나라 대표 원양선사인 현대상선은 내년부터 친환경 메가컨테이너선 20척을 순차적으로 인도받는다. 정부가 내걸었던 ‘해운재건 5개년 계획’에서 3대 추진방향 중 하나인 선박 확충이 실현되는 셈이다.
배 크기를 키웠는데 화물이 없으면 정부의 해운재건 노력은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다. 해운업을 살리기 위한 정부의 또 다른 핵심과제는 화물 확보다. 예전보다 더 많은 화물을 유치해야 하는 선사들로선 화주와의 장기적인 관계구축이 절실해 보이는 대목이다. 신조선 인도일이 가까워질수록 화물 유치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선사와 화주의 신뢰회복이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19일 서울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해운산업 재건 성과와 미래발전방안 세미나’에서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전형진 실장은 ‘지속가능한 해운산업 생태계 조성방안’이라는 주제를 통해 선사와 화주의 협력 필요성과 문제점, 대응방향 등을 설명했다.
해운 서비스의 공급자인 선사와 수요자인 화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장기적인 협력이 담보돼야 한다. 전 실장은 선사와 화주가 장기적으로 동반자적 관계를 구축하려면 무엇보다 신뢰회복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운업 시황 변화에 따른 이기적인 행동을 억제해 거래관계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선사 화주 모두 단기적 성과를 중시하다 보니 신뢰부족으로 장기적 거래관계를 회피하고 있다. 선사 간 과당경쟁도 협력과 파트너십 동기를 약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전 실장은 “해운업 시황에 따라 운임 변동이 생기는데 호황 때는 선사가 혜택을 가져가지만, 불황에는 화주에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양측 모두 위험을 줄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 실장은 선사들의 향후 대응방향으로 화주들의 물류문제에 적극 협력하고 화주를 위한 특별서비스를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수요를 기반으로 운임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해외에서 발생하는 물류 문제와 호황기와 계절적 성수기에 선사들이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밖에 정시성 담보와 우대운임 적용, 선복 우선 배정, 대량화물·장기계약 화주 차별 적용 등도 선사들의 신뢰회복 방안으로 꼽혔다.
정부가 선사와 화주의 협력관계 구축을 지원하는 건 보조적인 수단에 그친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를 매개체로 한 지원이 중단되거나 충분하지 않다면 선사와 화주의 관계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의미다.
화주는 협력으로 예상되는 이익을 선사로부터 얻을 수 없게 되면 이를 정부 지원으로 보충한다. 정부 지원이 충분히 주어질 때만 협력을 수용할 뿐이지, 선사와 화주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장기적이고 지속되는 깊은 관계가 아니라는 게 전 실장의 설명이다.
전 실장은 “화주 입장에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협력할 이유가 없다”며 “선사 화주 협력을 위한 정부지원은 보조적인 수단이지,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전 실장은 선사와 화주가 바람직한 협력관계를 구축하려면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계 ▲경영상 및 영업상 중요한 정보의 공유 ▲호혜적 의사결정 및 의사결정의 공정성 ▲이익 비용 및 위험의 공유 등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4가지 전제조건 충족에 의문이 생긴다. 해운경기가 호황 불황을 반복하는데 이때 이기적이고 기회적으로 행동하는 게 거래 관계를 훼손시키는 것”이라며 선사와 화주의 상호신뢰 회복을 재차 강조했다.
선사 화주의 협력으로 찾아올 기대효과는 상당하다. 선사들은 장기적으로 안정된 수요를 확보해 운임수입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선박투자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다. 화주 역시 수송비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긴급한 수요에 적기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해외에서의 물류문제를 선사의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전 실장은 선박 건조에 화주가 투자자로 직접 참여해 신조에 따른 수익을 공유함으로써 동반자적 협력모델을 확산하자고 주문했다.
더불어 화주가 펀드에 직접 투자해 펀드자금으로 선박을 발주하고 선박이용에 따른 수익으로 화주에게 배당금을 지급하자는 방안도 제시했다. 선사들은 펀드 참여 화주에 차등운임, 탄력적 선적 마감, 패스트 트랙 서비스 변경 등을 제공해 선사는 선박건조 자금 및 화물확보, 화주는 차별화되고 효율적인 운송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게 전 실장의 의견이다.
“국내 자율운항선박기자재 외국의존도 높아”
4차산업혁명을 맞는 조선업계가 불황 속에서도 친환경·자율운항선박에 대한 투자는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와 주목을 끌었다.
한국선급 천강우 박사는 ‘조선 신기술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자율운항선박은 4차 산업혁명시대 해운업의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며 “조선 불황 속에서도 미래를 위한 투자로 친환경·자율운항선박은 필수”라고 주장했다.
자율운항선박을 준비하는 해운조선업계의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천 박사에 따르면 현대상선은 ‘컨테이너 실시간 추적시스템’ 모바일 앱을, SM상선은 위성-IoT(사물인터넷) 연계로 컨테이너화물 실시간 추적기술을. SK해운은 선박 운항 컨디션·안전정보·스케줄 등의 데이터 공유·분석 플랫폼을 각각 도입했다.
조선소에서는 현대중공업이 재작년 운항비를 절약할 수 있는 통합스마트선박솔루션을, 대우조선해양이 자율운항시스템을, 삼성중공업이 에너지효율관리시스템·스마트선박 솔루션 ‘인텔리만 십’ 개발을 완료했다.
한국선급 역시 2015년 그린십 기자재시험·인증센터 구축을 시작으로 LNG 연료를 탑재한 <일신그린아이리스>, 전기추진선박인 <아라온> <에코누리> <이사부> <장보고> 등의 입급, 친환경선박·기자재 관련 규칙·지침 제정, 엔진·연료유·배출가스저감장치 등 연구과제를 실시하며 친환경선박 검사와 기술지원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다만 앞으로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천 박사는 SWOT(강점 약점 기회 위협요인)를 통해 약점으로 친환경 자율운항선박 핵심 기자재의 높은 해외 의존도와 조선해운 장기불황으로 선주 주도의 대규모 설비·연구개발 투자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더불어 위협으로는 중국 싱가포르 베트남 등 저임금·정부지원정책으로 상선시장을 맹추격하고 있으며, 조선해운업의 경기악화가 지속되며 고급인력 유출이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미나의 축사를 맡은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은 해운업의 성공적인 재건의 완수를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사항으로 임무 완수를 위한 정부의 노력과 해운재건 주체인 선사들의 자발적인 의지, 연관 산업 간의 상생을 위한 건설적인 협력을 강조했다.
해양진흥공사의 황호선 사장은 우리나라 핵심 기간산업인 해운업 재건을 위해서는 침체된 민간선박금융 활성화가 필수적인 요건임을 강조하고, 공사는 해운산업 스스로가 자체경기대응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해양수산개발원 양창호 원장은 환영사를 통해 해운산업 재건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국내 해운기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국내 산업구조와 해운기업의 중장기 전략을 연계하는 근본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최성훈 기자 shchoi@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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