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해운업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지난 18일 연출됐다. 선사 해양수산부 해양진흥공사 해양수산개발원(KMI) 대학교수 전문언론 등 한국해운의 핵심 이해당사자 60여명은 이날 오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콘퍼런스룸에 집결했다. 평소 가지고 있던 한국해운 재건 아이디어를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참석자들은 이날 오전 10시에 행사장에 모여 6개의 분임조를 구성한 뒤 곧바로 토론장으로 흩어져 뜨거운 격론을 벌였다.
분임토의에 앞서 엄기두 국장은 “오늘은 답을 내자는 게 아니라 해운재건과 관련해서 어떤 생각들을 해왔는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라며 “장기적인 관점이 아닌 3~5년의 기간 동안 필요한 해운정책을 논의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저녁까지 이어진 토론에선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토론 주제로 운임 공동행위의 경쟁법 위반 논란, 대기업 물류자회사 문제, 톤세제 연장, 해운기업 대형화 전략, 현대상선의 얼라이언스 가입, 원양선사의 근해항로 진출, 컨테이너박스 공동확보, 전략화물 종합심사낙찰제 도입, 장기화물 운송계약의 부채 반영 문제 등이 망라됐다.
‘불공정거래 조사’ 해운법 개정안 발의
특히 대기업 물류자회사의 시장 교란 문제는 해운업계의 고질적인 현안 과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 등 대기업의 물류자회사들이 물량을 무기로 운임이 올라가는 성수기엔 낮은 요율을 압박하고 비수기엔 운임을 바닥권까지 후려치는 행태로 선사들의 수익성을 흔들고 있다는 불만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선사들은 모기업과 물류자회사 거래를 제재하는 방법으로 왜곡된 시장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재 물류자회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건의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된 상태다. 윤관석 의원과 황주홍 의원, 윤준호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해운법 개정안이다. 윤관석 의원과 황주홍 의원의 개정안은 일정 비율 이상의 모회사 물량을 취급하는 물류계열사에 대해 2자물류 계약을 제한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관석 의원은 제한 기준이 되는 내부거래 비중을 30%로 확정했다면 황주홍 의원은 구체적인 숫자를 적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띤다. 윤관석 의원은 같은 내용으로 물류정책기본법 개정안도 발의한 상태다.
지난해 11월20일 윤준호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실질적인 정부안이라 할 수 있다. 내부거래 비중을 기준으로 한 2자물류기업 제재 규정은 없지만 선화주 간 공정거래 확립에 초점을 맞췄다.
표준계약서 작성 등 해운 계약에 공정성과 투명성 의무를 부과하는 한편 운임 우대 조건, 최소 화물 보장, 원가 상승에 따른 운임 협의 등을 장기계약에 포함하도록 명문화했다.
아울러 선화주의 화물운송계약 불공정 행위 신고기관을 해양진흥공사 선주협회 한중카페리협회 무역협회 국제물류협회 등 관련단체로 확대하는 한편 신고를 누구든지 할 수 있도록 했다. 해수부는 화주가 금지행위와 공정 계약 의무를 위반했다는 신고를 받으면 사업장을 직접 방문해 조사하게 된다. 선화주 상생 환경 조성을 위해 우수선화주기업 인증제도를 도입하는 내용도 담겼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와는 별도로 물류자회사들이 운송인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해운법 상 운송인으로 규정되지 않은 점을 들어 “미국처럼 무선박운송인, 이른바 NVOCC로 규정해 해운법의 적용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해운사 경쟁법 위반 불안감 고조
해운법과 공정거래법(경쟁법)의 충돌 이슈도 제기됐다. 지난해 12월 공정거래위원회가 한국 해운 역사상 처음으로 운임 담합 혐의로 일부 선사와 근해항로 운임동맹을 조사한 이후 선사들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현재 해운법 29조는 해수부장관 신고와 화주단체와의 협의를 전제로 컨테이너선사의 공동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운법과 경쟁법 간 시각 차이로 해운사의 공동행위가 불법적인 담합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인식이 커지는 실정이다. 특히 선사들이 스크러버(배출가스 세정장치) 설치나 저유황유 사용 등 국제해사기구(IMO)의 황산화물 배출 규제로 늘어나는 비용부담을 화주들에게 전가하는 조치가 위법행위로 판단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나온다. 근해항로 시장안정화를 위해 지난해 결성한 한국해운연합(KSP)까지도 경쟁법의 철퇴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감지된다. 이날 토론에서 일부 참석자는 기업들의 불안감 해소를 위해 정부에서 선사의 공동행위 허용을 좀 더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엄기두 해운물류국장은 행사 말미에 총평을 통해 2자물류와 운임 공동행위 등의 이슈를 직접 설명했다. 특히 윤준호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이 2자물류 문제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선사들이 (2자물류기업들의) 불공정 행위를 신고하고 싶어도 못했는데 (법이 개정되면) 선사가 아니더라도 제3자가 대신 신고하면 공정위가 아닌 해수부가 조사할 수 있게 된다”며 “그동안 제기된 문제점들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엄 국장은 선사들의 경쟁법 위반 논란에 대해선 “해운사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면서도 “위법이 되지 않도록 해운법에서 규정한 대로 선사들이 운임을 합의해서 올릴 땐 해수부에 신고하고 화주 측과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 줄 것”을 당부했다.
엄 국장은 또 “톤세제도가 연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한편 국적선원 승선 선박의 항비 할인 요청을 두고 “최근 통과된 필수선박제도는 국적선원을 태운 선박에 항비 50%를 감면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소개하고 “선사들이 제도를 이용해서 혜택을 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해운업계는 앞으로 한국 해운산업 재건 방안 마련을 위해 민관학연이 머리를 맞대는 워크숍의 정례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 이경희 부장 khlee@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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