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조가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집회를 하는 모습>
이달 방학을 맞은 물류고등학교 학생이 본사를 방문했다. 평소 알고 지냈던 터라 학생과 점심식사를 하면서 허물없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대뜸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고민을 털어놨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남들처럼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안락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2018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평범한 삶을 사는 건 너무 큰 고민이 됐다.
얼마 전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 대비 10.9% 인상된 8350원으로 확정됐다. 또 300인 이상 사업장의 근로시간은 주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됐다. 내년도 최저임금 8350원을 기준으로, 주 52시간을 근무하면 근로자는 매주 43만4200원을 손에 쥔다. 4주를 근무한다고 가정하면 월수입은 173만6800원 정도다.
부동산 중개 플랫폼 ‘스테이션3’이 공개한 올해 1~4월 서울 내 대학가 월 임대료는 보증금 1000만원 기준 약 46만9500원으로 나타났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2017년 기준 1인 이상 가구의 월평균 통신비는 13만7800원(유·무선 전화요금, 인터넷 이용료, 수리비, 단말기 할부금 등 포함)이었다. 여기에 교통비, 식품료·비주류음료, 음식·숙박, 주거·수도·광열, 보험료 등을 제외하면 실제로 수중에 남는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결혼자금을 준비하고 아이를 낳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삼긴 했지만, 일반 직장인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박광온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국세청으로부터 입수한 ‘2016년 귀속 근로소득 백분위’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로자 1774만98만명의 연평균 소득은 3359만원(월 약 280만원)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절반인 887만명의 월 소득은 200만원 이하에 그치고, 특히 10명 중 3명(532만명)은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여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는 국세청에 신고된 근로소득만 집계된 것으로 실제 일용직 근로자 등을 포함하면 임금 양극화는 더욱 심각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임금 수준을 대폭 올리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자영업자·소상공인·중소기업의 시름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내년도 최저임금을 더 높게 인상하지 못한 이유도 이러한 현실적인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나라 노동환경은 ‘을과 병’이 다투는 모양새다. ‘갑’으로 불리는 대개의 대기업은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저임금을 올리고 근무시간을 단축하면 대기업의 입지만 더 커지는 양상이다.
실례로 택배업종을 보면 CJ대한통운은 최근 몇 년간 택배단가를 낮춰 화주(고객)를 끌어 모았고, 그러면서 택배시장에서 50%에 가까운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했다. 동시에 경기도 광주에 메가허브터미널을 가동해 물류 효율을 높여 원가 절감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돼, 향후 택배시장에서 CJ대한통운의 영향력은 독보적일 것으로 관측된다.
반면 중소택배사는 CJ대한통운과 같은 대기업에 고객을 하나 둘 빼앗기면서 입지가 쪼그라들었고, 여기다 근로기준법까지 개정되면서 비용 상승이라는 이중고에 처했다. 앞으로 중소택배사는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 경쟁력을 키우거나 틈새시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지금과 같이 단가 경쟁이 지속될 경우 폐업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폭염이 두려운 택배기사, ‘특고직’의 비애
24년만의 최악의 폭염이 한반도를 강타했다.
폭염에 맞서 일터를 지키는 분들이 있다. 택배기사는 대표적인 현장 근로자다. 찜통더위에도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한 여름 더위와 맞선다. 정해진 물량을 한정된 시간에 배달하려면 더위를 이겨내야만 한다. 특히 요즘처럼 폭염이 지속되는 날이면 모바일을 통한 주문량이 늘기 때문에 택배기사의 업무량은 평소보다 더 많아진다.
무거운 짐을 들고 이곳저곳 누비다보면 어느새 온몸은 땀으로 젖는다. 땀을 많이 흘리면 현기증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땐 생수를 마시거나 사탕을 먹으며 버틴다.
택배기사가 택배를 하나 배송하면 손에 쥐는 돈(수수료)은 대략 700~1000원(업체마다 상이) 정도. 단순 계산으로 하루 200건의 택배화물을 800원의 수수료로 배달하면 손에 쥐는 돈은 16만원 가량이다. 여기서 유류비 등을 제외하면 순수익은 다소 낮아진다.
택배기사는 대표적인 특수고용직(특고직)이다. 특고직은 근로자처럼 일하는 위임계약이나 도급계약 형태의 개인사업자다. 쉽게 말해서 특고직 근로자는 근로기준법에 적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이나 근로시간 단축의 혜택에서 제외된다.
극단적으로 말해 연이은 폭염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당장 생계가 막막할 수밖에 없다. 최근 살인적인 폭염에 ‘폭염경보’가 발생할 경우 건설현장을 비롯해 산업현장 곳곳에선 근로자에 대한 근무를 중단하라는 지침이 내려지고 있지만, 배달직의 경우 우체국 집배원을 포함해 여전히 폭염과 맞서 싸우며 고된 업무를 이어나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정치철학을 앞세우고 있지만, 정작 살인적인 폭염에 근무하는 집배원에 대한 처우개선을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나마 집배원은 특고직인 택배기사에 비해 상황이 나은 편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기업은 폭염으로 물량이 폭증하는 이 시기를 사업의 기회로 삼아 근로자를 더욱 옭죈다. 누구 하나 죽어나가야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는 전통적으로 근로자와 노동을 대하는 정부와 기업가의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제대로 박혀 있다면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폭염에선 배송일자를 늦추거나 추가 인력을 투입해 근로자의 건강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
CJ대한통운대리점 VS 택배노조 ‘을과 병’의 싸움
지난 6월께 촉발된 CJ대한통운대리점연합회(대리점연합)와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택배노조)의 갈등은 대표적인 을과 병의 싸움이다. 대리점 연합회는 CJ대한통운 본사와 계약을 맺고, 택배 물량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동시에 특고직 근로자인 택배기사와도 계약을 맺는 다단계 하도급 고용구조를 취하고 있다.
2004년 우리나라 전체 택배물량은 연간 4억 박스에 불과했지만 2017년 23억 박스 수준으로 단기간에 아주 급속도로 성장했다. 택배물량이 늘어나면서 택배기업들은 ‘박리다매’ 영업전략을 취해 택배운임을 지속적으로 깎아 내렸다. 예를 들어 매달 100만 박스를 취급하는 홈쇼핑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기업의 택배운임이 10원만 낮아져도 연간 막대한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그래서 화주(고객)들은 ‘백마진’이라고 부르는 뒷거래를 통해 배송료를 추가로 깎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장구조에서 CJ대한통운 본사 역시 ‘을’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화주와 계약을 맺게 되고, 이 때문에 택배대리점과 택배기사는 더욱 낮은 배달수수료(운임)를 받고 더 많은 배송업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최근까지 CJ대한통운대리점과 택배노조가 갈등을 빚었던 원인은 결국 ‘돈’이다. 택배노조는 분류작업이 택배기사의 업무가 아니라는 입장을 보이며 추가적인 수수료 지급을 요구했고, CJ대한통운 본사와 대리점은 상·하차 분류 역시 배송의 일부임으로 수수료를 지급할 대상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택배노조는 배송은 하되, 분류작업은 거부하겠다는 뜻을 보였고, 울산·창원 등 영남권에서 시작된 갈등이 수도권까지 확산되면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듯 보였다. 다행히 민중당 김종훈 의원의 중재로 갈등이 어느 정도 봉합된 상황이지만, 양측의 입장차가 팽팽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다시 문제가 곪아 터질 수 있다.
다단계 운송시장 혁신 ‘골든타임’
얼마 전 SNS(소셜네트워크)에서 가장 아까운 비용 중 하나가 ‘택배비’라는 글을 접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택배는 공짜라는 인식이 짙다. 단기간에 전자상거래가 급속도로 발전한 바탕에는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택배기업과 택배대리점, 택배기사의 희생이 존재했다.
좋게 말하면 희생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제살 깎아먹기’의 단순 단가경쟁으로 택배산업의 서비스 개선과 선진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나마 쿠팡이 로켓배송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시설투자를 확대하고 물류효율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CJ대한통운이 이러한 부분에서 가장 선두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휠소터와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현장근로자의 작업환경을 개선해 나서고 있다. 지난해부터 기자가 몇 차례 휠소터를 현장에서 취재한 결과 아직까지 개선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현장 근로자의 근무환경이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택배노조가 CJ대한통운을 표적으로 삼아 분류작업 거부에 돌입하긴 했으나, 한진이나 롯데글로벌로지스 등 2, 3위 택배기업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택배노조 관계자 역시 CJ대한통운을 시작으로 전체 택배시장의 선진화를 이끌어 낸다는 구상을 수립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택배노조 내부에서도 특고직을 유지하면서 수수료 인상을 요구하는 입장과 특고직 폐지를 통한 정규직 채용을 요구하는 입장으로 나뉘어 확실한 입장정리가 안된 상황이다. 이유는 배송을 맡는 권역에 따라 택배기사 각각의 수익이 차이를 보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택배차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특고직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택배기업 본사에 정규직 채용을 권유하고 있지만, 비용 상승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며 “정규직을 채용하면 부족한 번호판을 제공하겠다고 하는데도 택배기업 본사가 나서지 않으니 저희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지금과 같이 택배기업 본사에서 대리점 택배기사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에선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고, 간혹 화물운송용역업체가 개입되면 더 복잡한 계약관계를 맺는다. 당연히 수익성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다 매년 택배단가가 하락하면 택배기사는 더 낮은 수수료를 받고 더 많은 물량을 배송해야 하는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고 있다. 특고직은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연차휴가도 없고 불가피하게 휴가를 사용할 경우 자신의 비용으로 용차를 사용해야 한다. 그밖에도 열악한 작업환경이나 복지, 각종 질환(허리통증, 무릎관절질환 등), 페널티 및 손해배상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산재해 있다.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지금 택배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택배기사 단체설립 활성화 ▲근무시간 규제 및 가산수당 지급 ▲집배송 업무에 집중토록 관리 ▲택배기사 수수료 최저선 확보 ▲불공정한 위수탁계약 근절 ▲자율적 개선 유도 ▲의무적 산재보험 가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각 이해당사자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해나가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최근 일련의 분류작업 거부로 극단적인 상황이 초래되면서 소비자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서로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택배산업은 단기간에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시장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택배시장 구조는 여전히 다단계 구조의 후진적인 근무환경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택배기사의 분류작업 거부로 촉발된 ‘택배대란’을 보면, 이는 전초전에 불과한 듯하다. 근본적인 혁신과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택배파업은 언제든지 초래될 수 있다.
< 김동민 기자 dmkim@ksg.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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